칭기즈칸(成吉思汗)과 첫 번째 ‘세계화’

김다연 기자 newschina21@naver.com | 2019-03-12 13:18:13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김다연 기자]

수천 년 동안 세계를 바꾼 중국인이라면 칭기즈칸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것이다. 일단산사(一团散沙)의 몽골인들을 이끌고 극노윤(克鲁伦) 강가의 작은 부족에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몽골제국으로 발전한 전체 강역면적은 예나 지금이나 제국 가운데 꼽힌다.

▲ <칭기즈칸과 오늘의 중국의 형성>
작자: 영 존만
번역자: 야오젠겐(姚建根)
출판: 충칭 출판사
정가: 68위안

 

원나라는 중국 왕조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원나라에서 송나라를 대신하면 ‘천하를 잃을까’? 등 국내외 사학계가 논란을 빚어 왔지만 변방 유목민족이 중원 지역을 정복한 것은 상나라 주나라 때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영국 역사학자 존만의 <칭기스칸과 오늘의 중국 형성>에서 칭기스칸을 중국인으로 분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칭기즈칸은 ‘무공개세(武功盖世) ’ 이지만 이전의 제국 정복자에 비해 특별한 사람이다. 살육심중(杀戮深重)에도 불구하고 칭기즈칸은 자신을 야만인으로 여기지 않고 내심 자랑스러워하였다. 책에 기록된 기도사(祈祷词)를 보면 그가 열심히 나라를 확장한 것은 마치 ‘선의’에서 나온 것 같다. ‘천하에서 왕이 하나밖에 없으며, 시람들은 아마 끊임없이 죽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 라고 쓰여졌다.


칭기즈칸은 여러 해 전에 운명이 잘못되었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며, 이것이 그에게 신앙과 같은 사명감을 갖게 했고 스스로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도록 선택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몽골의 장생천숭배(长生天崇拜)에서 시작해서 몽골인들의 새로운 미래를 찾는 열광적인 이상주의자로 변신했으며, 몽골인을 이끌고 새로운 미래를 찾았다.

 

그는 강철 칼과 준마를 신봉하지만 사절을 파견하여 적과 가장 많이 담판하는 정복자이다. 그러나 그가 내건 까다로운 조건은 대부분 몽골 사절에게 살신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그 족속을 이끌고 장생천 앞에서 통곡함으로써 전군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것은 종종 무왕불승(无往不胜)의 효과를 초래했고 그의 자손과 국민들이 금, 서하(西夏), 대이(大理)와 남송(南宋)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하나로 연결되게 하였다.


칭기즈칸은 오래된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유례없는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으며 폭력을 주도하는 첫 세계화를 무심코 이뤄냈다. 칭기즈칸의 ‘황금가족’이 분봉된 각 칸나라 간에는 자유롭게 통상하고 교류할 수 있어 전대미문(前所未有)의 종대교환, 자원대교환, 문화대교류가 이뤄졌다. 동방세계는 충분히 하나로 연결되었다.

 

중국 북서부를 포함한 중앙아시아는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문명의 변두리, 변방에서 중추적인 연결고리로 바뀌었다. 몇몇 문명의 축심지대(轴心地带)는 동방 중국과 서유럽처럼 몽골 제국의 확장을 위한 최후의 전장이 되고 있다.


칭기즈칸이 서방에 끼친 가장 큰 상처는 무력 정복이 아니라 ‘흑사병’이다. 몽골 초원의 흙발쥐(土拨鼠) 벼룩이 페스트를 사람에게 퍼뜨려 유행병을 만들었다. 몽골과 유럽이 대치하고 있는 크림에서는 페스트에 감염된 시신을 유럽인에게 다시 던졌다.

 

이것은 유럽의 중세 최대의 악몽인 인구의 3분의 1을 멸종시킴으로써 서양인들에게 칭기즈칸을 흉노족의 수령인 아틸라에 이은 ‘하나님의 채찍’으로 보이게 했다. 인구의 격감은 서양의 기술혁신과 항해의 발전에 더욱 의존하는 것을 촉진함으로써 동양 대제국의 거듭된 침략을 막아냈다. 기술의 혁신은 르네상스를 촉진시켰고 항해의 발전은 또한 신대륙의 발견을 촉진시켰다.


몽원은 중국의 통치에 대해 극도로 산만했고 폭력적이었고 상업을 중시했고 글을 잘 쓰지 않았으며, 국정을 게을리했고 세금을 거두는 일조차 참을 수 없어 전세 세제를 도입하였다. 행성제의 성립은 군호화(军户化)의 새로운 변체로서 무력으로 나라를 감독했다. 당송(唐宋)은 충분히 번성한 동양문화에 도달해서 칭기즈칸 이후 명청까지 사실 야만화의 쇠퇴상태를 처했다.

 

그러나 중국은 몽원이 시작한 ‘세계화’ 행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교토대 산산정명(杉山正明) 교수의 말씀처럼 원나라 이전의 중국은 ‘소중국(小中国)’ 이었고, 원나라 이후 ‘대중국(大中国)’으로 방향을 바꿨다. 칭기즈칸과 홀필열(忽必烈)을 거쳐 문명이 풍부한 한문화지구는 이제부터 넓은 땅을 아우르는 중책을 짊어져야 만 하였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도 동양의 지역적인 ‘중앙대국’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그로부터 일파만파의 진정한 ‘세계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리적 개념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자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중국이다.

[글/타우린(陶林)]

 

[저작권자ⓒ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카카오톡 보내기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김다연 기자 다른기사보기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헤드라인HEAD LINE

포토뉴스PHOTO NEWS

많이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