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찬, 수수께끼와 꿈의 세계를 촬영하다

누군가 중국에서 가장 핫한 젊은 감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비찬의 이름은 빠질 때가 없다.
그는 소규모의 유랑극단으로 장편 영화 ‘노변야찬(路边野餐)’을 찍었으며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와 금마상 등에서 중요한 영화제의 인정을 받는다. 현재 상영중인 두 번째 장편영화 ‘지구 최후의 밤’은 평단과 젊은 문학인들의 감탄을 받고 있다.
그의 촬영 스타일은 분류하기 어렵고 늘 촉촉한 꿈의 세계가 뒤섞여 있어 마치 수수께끼와도 같다.
지한숙 기자 newschina21@naver.com | 2019-03-04 14: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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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지한숙 기자]

비찬은 촬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매번 긴 터널을 통과해 촬영지가 있는 궁쾅(汞矿) 유적지 내부에 도착한다. 광산 지역은 구이저우 단자이(丹寨)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첫 장편 영화인 ‘노변야찬’을 찍을 때 비찬이 그 주변을 답사하고 발견한 신비로운 곳이다.

 

▲ 비찬(毕赣)

사람들은 그를 묘사할 수 있는 적당한 어휘를 찾지 못해 영화 고수라는 표현을 들어 그를 부르고 있으며 ‘구이저우 왕쟈워이(贵州王家卫)’, ‘중국 아피찻퐁’, ‘제2의 자아장커’로 부르고 있다.사진 본지기자 둥제쉬(董洁旭) 

 

이 광산지역은 1950년대 소련인의 지휘를 받아가며 건설됐다가 1990년대 말에 자원이 고갈되었지만 광구는 지금도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시간이 정체된 듯한 느낌이다. 터널은 어둡고 수은은 연못의 물을 바다의 푸른색으로 변하게 하는데 이곳의 모든 것은 약간 허황된 모습을 띠고 있다. 이 풍경들이 비찬의 영화 속에서는 마치 굴곡이 심한 깊은 미로처럼 그 캐릭터들을 다시 꿈과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광산과 공사현장은 현실에서도 비찬에게 낯선 곳이 아니다. 구이저우는 워낙 산이 많은 지역으로 그는 광산폭파자격증 시험공부를 했고 한때 광산폭파 관련 회사에 출근할 계획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위챗(微信) 프로필 닉네임은 ‘폭파원’으로 되어 있다. 그는 산을 폭파하는 것이 영화 촬영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광산폭발과 영화 촬영은 모두 미리 모든 준비를 하고 멀리 사람들의 눈앞에서 폭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딩졘궈(丁建国)의 제지로 그는 첫 번째 계획을 접었으며 스승과 가족들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영화 촬영에 매진했다.


그 뒷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2015년 감독 특유의 영화 언어와 트레이드마크인 롱 테이크로 비찬은 소규모의 촬영 팀을 이끌고 장편 영화 ‘노변야찬’을 찍었다. 해외 전문 매체들은 비찬의 작품을 ‘마스터의 원형’, ‘복제 불가능한 처녀작’이라고 평가했다.


‘노변야찬’의 성공으로 비찬에게 자본이 들어왔고 두 번째 장편영화를 찍을 때 투입된 자금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2018년 마지막 날 ‘지구 최후의 밤’이 개봉되었다.


열정을 지키다
인터뷰 전날 밤, 비찬은 게임기에 접속해 로그인을 하고 게임파트너들과 함께 맹타를 휘둘러 연거푸 다섯 게임을 이겼다. 영화 제작 주기가 길고 그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여유가 생기면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비찬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다 본 후에 저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고 게임을 하러 가고 싶어요. 저는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하고 싶고 끝난 후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며 또 다른 일을 찾아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를 쓰는 것도 그렇다. ‘노변야찬’에 삽입된 시가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지금은 되도록이면 시를 쓰지 않으려 하고 쓸 수 밖에 없을 때에만 그는 펜을 잡는다. 이는 열정을 지키는 그만의 방식이다.

 

1년만 있으면 그는 만 30세가 된다. 예전에는 술도 마셨는데 지금은 건강을 생각해 끊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생활방식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비찬은 영화에 대해서도 역시 신중했다. 그는 현실과 예술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두 세계의 정상적인 운행을 유지하였다.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자 아버지의 역할로 돌아오며 이제 곧 둘째 아이를 맞이하게 된다.

 

평소에는 집안 어른들과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는다. 밖에 나가면 그는 감독이다. 영화 촬영 자체에 대해서도 창조적인 부분과 사무적인 부분을 분리하며 홍보 인터뷰를 본연의 업무라고 하면서 여러 자리에서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대해 ‘출근’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그 은밀한 열정과 표현의 욕망은 그대로 휴대폰의 메모장에 들어있다. 친한 친구인 량카이(梁凯)는 비찬은 언제나 창작에 매진하며 같은 일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량카이의 인상 속에서 비찬은 늘 노래하는 중년 남성이나 조숙한 소년 등 반전이 있는 사람과 일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량카이는 비찬과 같은 고향 사람이자 산시(山西) 미디어대학 후배이며 나중에 ‘노변야찬’의 녹음을 책임지고 맡았던 녹음기사이다. 두 사람은 2012년 구이양(贵阳)에 ‘칸촤옌더(看花眼的) 웨딩 스튜디오’를 열었다. 두 사람은 새벽 두세 시에 일어나 4시에 결혼식을 올리는 고객의 집에 도착해 바쁘게 일하기 시작했다.


량카이는 구체적인 촬영을 맡아야 할 때가 많다. 밤에 그는 영상을 편집하느라 바빴고 비찬은 여전히 창작을 계속하고 대본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영화를 찍기에 적합한 캐논 5D 디지털 DSLR 카메라를 선택해 사용했지만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은 기계가 너무 작아서 기품이 부족해 보인다고 피드백을 줬다. 그러다 장사가 점점 줄어들어 두 젊은이는 곤궁에 빠졌다.


돈이 없을 때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면만 먹었는데, 이는 거의 면을 먹지 않는 남방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비찬이 쓴 ‘금강경’이라는 제목의 대본을 선택해 20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비찬은 고모부인 천융중(陈永忠)을 데려와 영화 속 배역을 맡게 했다.


이는 ‘노변야찬’ 인물 관계의 초석이 되었다. 비찬의 스승이자 훗날 작품의 제작과 기획을 맡은 딩졘궈도 그 당시 이미 비찬은 자기스타일의 미학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노변야찬’보다 더 정교하였다고 평가했다.

 

딩젠궈는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그는 자신의 연출법은 기본적으로 이미 찾아냈다. 비록 음성 제작 면에서는 아직 미흡했고 후기 혼음을 포함해 경험과 기술적인 면에서 조금의 부족함이 있었고 자금력에도 한계가 있었지만 말이다”라고 말했다.


이 단편영화는 2년 뒤 홍콩 단편영화 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단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많은 동갑내기 영화 제작자들을 비롯해 나중에 자신의 아내가 된 사람까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2012년에 비찬의 웨딩 스튜디오는 폐업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는 다시 현실적인 압박을 느끼면서 살아야만 했다.


가족들은 계속 비찬의 생계를 위해 방법을 강구하며 그를 위해 터미널에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주었다. 비찬은 홀로 타이웬(太原)으로 건너가 대학시절의 스승이었던 딩젠궈와 술 한 잔 기울이며 함께 방법을 고민하고 돈을 마련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비찬은 약간 체념했다. 딩젠궈는 제자가 영화 촬영을 계속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비찬의 영화제작에 힘을 실어주었다.


스승은 자신이 22년 동안 가르쳤던 제자들 중 비찬이 가장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학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딩젠궈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창작은 대부분 개인적인 생명의 경험을 기초로 하며 그는 자신의 생존 환경과 성장 기억에 대한 초보적이지만 완전한 이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나중에 비찬이 현실과 씨름할 때도 그는 외부와의 연락을 멈추지 않았다. 낮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밤에는 인터넷으로 만난 친구들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는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시크릿이 됐다.

 



사람들은 그를 묘사할 수 있는

적당한 어휘를 찾지 못해

영화 고수라는 표현을 들어

그를 부르고 있으며

 ‘구이저우 왕쟈워이(贵州王家卫)’,

 ‘중국 아피찻퐁’,

 ‘2의 자아장커

부르고 있다.




여정 중의 비밀
묘족 말에서 ‘비밀’이라는 단어의 발음은 ‘탕마이(荡麦)’와 유사하다. 나중에 이 단어는 ‘노변야찬’에 허구로 등장한 지명이 되었다. 주인공 친승(陈升)이 걷는 여정은 마치 기억 속을 헤매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다. “어둠은 나그네의 얼굴에 내려앉고 그는 일행과 함께 태양의 조급하고 강렬한 빛을 따라 걷는다.”


현실 속에서 ‘탕마이’는 비찬이 다른 사람과 합작하여 만든 영화 회사의 이름이다. 그는 신작 영화 ‘지구의 마지막 밤’을 홍보하느라 고향인 구이저우 카이리와 다른 지역을 번갈아 돌아다니며 바쁘게 보내고 있다.


비찬에게는 고향과 타향의 경계선이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는 구이저우 카이리(凯里)에서 나서 자랐고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과 창작을 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본 적도 없지만 고향이라는 ‘논리’에 빠져본 적도 없다. 삶의 지도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시대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강렬한 흔적을 남지 않았다.


또 그의 관심사는 사회 구조 속의 개인에서 개인의 내부 세계에 대한 탐구로 이동했다. 자아에서 출발해 비찬은 자신의 미학 세계를 만들었고 자신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인생 여정을 시작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 과거의 자아와 만나고 또 다시 작별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성장 공간의 또 다른 위도는 가정이다. 비찬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조부모와 함께 산 시간이 많았다. 격세지감의 성장 환경은 그가 삶의 현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었고 유년기 시절 기억은 빗줄기처럼 비찬의 영상 속에 시공을 초월해 스며들었다.


짜릿한 영상 여정이 이로써 시작되었다. 2013년 그는 가족들로부터 받은 2만 위안을 들고 이리저리 맞춰가며 ‘노변야찬’ 촬영을 시작했다. 대본은 2년 동안 다듬었고 졸업 전부터 창작을 시작해 졸업 후 2년 동안 끊임없이 갱신하고 업그레이드했다.

 

그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묘사할 적당한 어휘를 찾을 수 없었고 영화 대가들을 참조로 하여 ‘구이저우 왕쟈워이’, ‘중국 아피찻퐁’, ‘제2의 자아장커’라고 불렀다. 이 영향력 있는 리스트 외에도 타코프스키, 허우샤오센(侯孝贤)도 포함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를 표현할 수 없다. 나중에는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일컬어 ‘비찬스럽다’는 표현이 붙었다.


영화 ‘지구의 마지막 밤’ 개봉 전 비찬은 쉬즈웬(许知远)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쉬즈웬은 비찬과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외부 세계를 개조할 가망이 있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했다. 비찬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로서 특히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공공생활이 산산조각 난 이 시대에 비찬의 카메라는 자신을 향해 있었다.


비찬은 학자인 다이진화(戴锦华)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은 몇 세대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으며 굳이 말한다면 ‘인터넷 시대’의 감독이라고 말했다.


비찬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하나를 설명할 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말한다고 했을 때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것이 예술의 흥미로운 부분아 아닐까 싶다. 아마 시간이 10년, 심지어 50년이 지났을 때 많은 이들이 우리들로 새로운 것을 묘사하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지구의 마지막 밤’을 만들 때도 그는 이런 의식이 강렬했다. ‘고전적이면서도 참신한 내용’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잃어버린 시간
‘노변야찬’의 성공 이후 그는 투자와 협력을 하고 싶다는 많은 전화를 받았으며 이를 고민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그는 자기 표현과 공업 표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했다. 영화는 타협의 예술이라는 주변의 말에도 불구하고 타협이 그에게는 성립되지 않았다. 점점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찬은 여전히 순수한 영상세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신작 ‘지구 최후의 밤’은 블랙 영화의 패턴을 본떠 미스터리, 탐정, 사랑의 코드를 섞은 영화지만 시시각각 고유의 리듬을 깨고 있다. 주인공인 뤄훙우(罗纮武)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어둡고 습한 시공간에서 12년 전의 신비로운 여자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기억 속에 잠겨 지연된 행동과 변환된 신분 속에서 헤매다가 종착역에 이르기 전에 꿈과 수수께끼 같은 허상에 빠져 이미 놓친 사람들과 다시 한번 작별을 고한다.


딩젠궈에 따르면 비찬은 금마상 도전 시간을 맞추기 위해 대본의 줄거리를 재빨리 완성했다. ‘노변야찬’과 달리 이야기는 그 동안 비찬이 쌓아온 독서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자신은 신작의 영감이 샤갈의 그림, 모디아노의 소설, 그리고 파울 첼란의 시가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앞부분은 기억이고 롱 테이크 화면은 양귀비 꽃과 같은 꿈나라이다.


2017년 6월 영화는 크랭크인에 돌입했다. 이미 대본이 있긴 있었지만 완성까지 높은 난이도가 따랐다. 영화 촬영에 투입된 비용이 수십 배 늘었고 촬영 요구와 제작진들도 대폭 업그레이드되면서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비찬과 같은 ‘야생’ 감독에겐 이런 조건들이 한계일 수도 있었다. 촬영 내내 기존 촬영 방식의 전환이 필요했고 대본 수정도 필요했다.


외부의 관심이 가장 많이 집중 된 것은 역시 롱 테이크 부분이었다. 이번 롱 테이크 부분은 ‘노변야찬’의 40분보다 더 많은 1시간 이상이었으며 3D로 촬영됐다. 하지만 3D든 롱 테이크든 모두 서사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가 담으려고 했던 부분은 꿈에 대한 진실된 재연이다.


이런 것들을 비찬은 노련한 사고로 풀어내는 동시에 어린애 같은 순수함도 들어있었다. 어린 시절과 노년이 동시에 이 30세 미만의 젊은이에게 존재했다. 영화의 상업적 물결 속에서도 그는 영상 그 자체의 힘을 믿고 영화 속에 가장 영화적인 요소에 가까운 방식을 시도하여 담으려 했으며 정지된 집을 회전시키고 탁구채의 독수리 문양을 회전 중에 날게 함으로써 짧은 불꽃을 오래도록 반짝이게 만들었다.


3D로 시작되는 순간 캐릭터들은 관객들과 함께 안경을 쓰고 꿈속으로 떨어졌다. 주인공인 뤄훙우는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나와 삭도를 따라 폐쇄된 교도소 자리로 내려가고 감옥 옆 당구실에서 야외무대로 내려와 계속 추락했다가 날아올랐다. 배경음악이 울리고 묘족의 전통 가락이 망혼을 부르는 소리처럼 허황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비찬은 이 음악을 아주 좋아한다. 묘족과 한족의 혼혈의 후예인 그는 공식적인 홍보나 관광 책자에 실린 내용에 비해 이런 음악이야말로 묘족 전통 음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들판에 있는 귀신들과 산바람은 가장 생생한 언어를 구성했다.


또 다른 문제는 언어이다. 주연배우인 탕웨이(汤唯)는 구이저우(贵州)어를 할 줄 모른다. 황줴(黄觉)는 비록 광시(广西) 사람이긴 하지만 구이저우에서 사용하는 방언과는 차이가 있다. 비찬은 창작과 표현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이 직업배우들이 자신이 요구하는 표현과 완벽한 합일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비찬은 량카이를 황줴의 옆에 붙여줬으며 황줴가 촬영 틈틈이 대사에 신경 쓰도록 귀띔해주는 역할을 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배우는 자연스러운 대사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제작 후 지난해 5월 칸 영화제 ‘관심’ 부문에 선정된 데 이어 제5회 금마상 5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최우수 촬영, 음향, 오리지널 음악 3개 부문을 수상했다. ‘할리우드 논평’은 이 영화에 대해 “관객들을 기억과 슬픔의 세계로 안내하고 느리면서도 평온하게 달리는 롤러코스터 여행과도 같이 관객들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독특한 영상기법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이 중 60분에 달하는 롱 테이크는 영화계에서 오랫동안 화제로 떠오를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글 류웬항(刘远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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