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바르셀로나 탐방① 가우디와 구엘공원 및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견문

글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대표 newschina21@naver.com | 2019-02-07 13: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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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대표]

 바르셀로나 가우디 투어, ‘천재를 꽃피게 한 사람들’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바르셀로나 ‘가우디 투어’는 아침 8시반 집합이었다. 월드옥타 바르셀로나 신임 지회장 박명신 ‘벤츠투어’ 대표가 운영하는 ‘1일 가우디 투어’에 참여했다.


집합 장소로 가자 박명신 대표가 참여자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날 바르셀로나 시내 ‘가우디 투어’를 함께 하는 사람은 14명이었다. 함께 투어하기로 한 김부향 전 바르셀로나한인회장도 나와 있었다.


최근 3, 4년 사이에 바르셀로나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무척 늘었다고 한다. 심지어 지난 해만 한국관광객 47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박명신 대표는 “2014년 ’꽃할배‘ 팀이 다녀간 후 한국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소개했다.


개별관광을 오는 사람도 늘어서 투어회사들도 최근 무척 바빠졌다고 박대표는 소개했다. 투어회사들은 단체 관광과 달리 개별로 온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 전문가이드가 안내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처음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는데, 가이드를 따라 다닐수록, 이 같은 ‘투어’에 참여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카사 바트요 주택


첫 행선지는 ‘카사 바트요’였다. ‘카사’는 스페인어로 건물 혹은 주택이라는 뜻이다. 바트요 주택은 바르셀로나 메인스트리트인 ‘파세 드 그라시아(은혜거리)’에 있었다. 투어 집합지에서 멀지 않아 걸어서 바트요 주택으로 가니 이미 관광객들 백여명이 모여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이 절반은 되는 것 같았다.


바트요 주택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가 설계했다. 1904년에서 1906년에 만들어진 주택으로, 화려한 외관에 직선 없이 곡선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건물 전체에 바르셀로나 수호신의 이야기 같은 스토리가 녹아 들어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


당초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겉에서 보면, 해골 같은 뼈를 보는 듯 기괴하면서도, 타일조각들이 화려하게 배치돼 아름다웠다. 실제로 용과 칼 같은 것이 발코니나 기둥 등으로 표현돼 있다. 외벽 타일그림은 프랑스 인상파화가 모네의 대작인 ‘수련’을 모방했다. 

▲  카사 밀라

 

 

 

이어 찾은 곳은 인근에 있는 ‘카사 밀라’였다. 바트요 주택 완성에 이어서 1906년에서 1910년에 만들어진 밀라 주택도 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변 건물과 어울리기에는 너무 독특했다. 외관이 곡선으로 됐다는 점과 다양한 스토리가 건물에 녹아 들었다는 점은 바트요 주택과 비슷했다.


가이드는 이 건물이 건축 당시에 ‘채석장’같다고 비난 받았다고 소개했다. 심지어 유명신문 기자가 ‘비행기 격납고 같은 두더지굴’이라고 비난했다는 말도 들려줬다.


그 ‘두더지굴’이 지금은 유명관광지로 바뀌었다. ‘해골집’ 같은 바트요 주택도 마찬가지였다. 지중해에 물결치는 미역을 소재로 해서 외관을 꾸몄다는 건물이었다. 옥상에는 독특한 굴뚝이 늘어서서 마치 달에 간 것 같은 이미지를 연출했다.


오전 일찍인데도 이 두 건물 앞은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건물들마다 입장료를 내고 내부관광을 하려는 사람들로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가우디는 지금으로 보면 ‘삐딱한 사람’이라 하겠지요. 남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한 사람이었잖아요.”
김부향 회장이 말을 꺼냈다. 지금 우리한테도 이상하게 보이는데, 100여년전 바르셀로나인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할 만했다.


“이 같은 천재를 알아보고 천재에 거액을 투자를 한 사람이 있다는 게 더 대단하잖아요.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이것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바르셀로나로 모여들고 있으니…….”


김 회장은 천재도 대단하지만, 천재를 알아본 투자자도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섬유업자이자 신문사 사주였던 바트요나 과테말라 커피농장 상속녀인 밀라 부인 같은 사람이 가우디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건물이라는 것이다. 이 건물 모두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우리 사회도 가우디 같은 괴짜가 나타나면, 그것을 읽어내고 거액을 투자할 ‘괴짜 투자자’가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남과 다름’을 인정하는 열린 사회일까? 남남갈등에 빈부, 세대, 성별 등 갈등까지 덧붙여 SNS마다 ‘전투’로 몸살을 앓는 현재의 한국에 비춰보면, 당시의 바르셀로나는 너무 달랐던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구엘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그리고 천재를 몰라본 사람들


 

▲  ​구엘공원의 다리 교각

 

다음 행선지는 구엘공원이었다. 바르셀로나 해안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구엘공원은 당초 분양을 목적으로 한 전원주택단지로 계획된 곳이었다.


주택단지 조성과 건축은 1900년에 시작해 1914년까지 진행됐다. 가우디 후원자인 구엘 백작과 예술가로서의 가우디 꿈이 결합된 대형 주택 개발사업이었다.


중앙 광장을 가운데에 두고 주변을 자연석을 이용한 다리로 이어서 60채의 전원주택들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자연과 어울린 구조였으나 입주신청을 한 사람은 구엘 백작 가우디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분양이 실패한 것이다.


이 단지는 결국 구엘 백작 사후 바르셀로나 시에 기부됐다. 지금 가우디가 살던 집이 가우디기념관으로 활용되는 것 외에는 모두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주도에서 와서 이 다리를 보고 갔어야 하는데요.”
제주도가 고향인 김부향 회장이 자연석으로 된 구엘공원의 다리 교각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자연석을 쌓아 올려 만든 교각은 가운데가 좁고 위와 아래가 넓었다. 나선형으로 돌을 쌓아 올라간 교각도 있었다.


“제주 화산석으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 풍경을 만들 수 있잖아요.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을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구엘공원은 분양주택으로는 실패했으나, 공원으로는 대성공이었다. 이날도 구엘공원은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으로 붐볐다. 스페인어는 물론,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들이 들렸다.


누군가의 실패가 밑거름이 됐다고 할까? 구엘과 가우디의 이 실패한 사업지는 100년이 지난 지금, 의도치 않게 바르셀로나의 관광명소로 바뀌어 바르셀로나 시의 재정을 튼실하게 불려주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었다. 우리는 구엘공원에 올 때처럼 투어사에서 제공한 벤츠 승합차를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으로 갔다. ‘성스러운 가족 성당’이라는 뜻이다.


“소지품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방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됩니다. 휴대폰도 지갑도 뒷주머니에 넣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가이드가 소매치기를 주의해야 한다고 거듭 경고를 했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250만명의 관광객의 소지품을 노리는 사람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다는 경고였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가방을 들고 달아나던 사람을 경찰이 붙들었던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일생을 바쳐 설계하고 공사한 건물이다. 가우디 평생에 완공을 못했으며, 지금도 그의 설계에 기초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1882년 착공돼 130여년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 초대형 성당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된다고 한다.


성당 착공 후 1년 뒤 이 성당 수석 건축가가 사임하면서 가우디가 건축 디자인 책임을 떠맡았다. 가우디는 당시 무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에게 디자인을 맡긴 성당측도 배짱이 두둑했던 듯하다.


가우디는 이 성당에 머물며 성당 건축에 심혈을 다 쏟았다. 자신이 번 돈과 재산도 모두 성당 건축에 쏟아 부었다. 성당 건축공사는 오로지 기부금에 의해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진행이 느렸다. 가우디는 열심히 기부금을 모으러 다니기도 했다. 지금도 정부지원 없이 관광객들의 입장료와 기부금으로 이 대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가우디는 1926년 향년 73세로 타계했다. 그때도 이 성당은 공정이 15%에 불과했다고 한다.


가우디의 죽음에도 슬픈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가우디는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노면전차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운전수는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냥 가버렸다. 가우디는 세 번이나 택시를 세웠으나, 그때마다 기사들은 승차거부를 했다. 네 번째로 겨우 태워준 택시 운전사는 일반 병원이 치료거부하자, 가우디를 무료 빈민병원에 내려다 놓고 가버렸다.

 

뒤늦게 가우디를 알아본 간호사가 덕택에 연락을 받은 친지들이 달려와 가우디를 다른 병원에 옮기려고 했으나, 이제는 가우디는 거부했다.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한테 거지차림의 가우디가 이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면서 버티다가 3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그의 유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지하에 안치됐다.

 

▲  바르셀로나 항에 있는 콜럼버스 상

 

  

가우디 사후 그를 몰라본 사람들은 호된 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를 치고 달아난 노면전차 운전기사는 파면과 동시에 구속됐고, 승차거부를 한 택시운전사들도 엄한 벌을 받았다. 치료를 거부한 병원도 거액의 배상금을 물었다고 한다. 천재를 몰라본 벌이랄까.


가우디 투어를 마치자, 김부향 회장이 ‘또 봐야 할 데가 있다’면서 바르셀로나 대성당과 주청사 및 시청사 거리로 안내했다. 도시 중심에 대성당이 있고, 그 옆으로 시청과 시장이 있는 구조는 바르셀로나도 여느 유럽 전통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에 비해 시청사와 주청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모습이었다. 시청사 건물에는 노랑리본 마크도 내 걸려 있었다. ‘카탈루냐지역 독립을 추진하다가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뜻을 그 사랑마크가 담고 있다고 김부향 회장이 소개했다. 바르셀로나도 카탈루냐지역에 속한다.


시청사 옆으로 좁은 골목을 타고 시장이 조성돼 있었다. 바르셀로나 축구팀 유니폼 등 다양한 기념품들도 전시돼 있었다.


이날 바르셀로나 투어는 콜럼버스 동상이 서 있는 바르셀로나 항과 황영조 선수가 1등으로 들어온 바르셀로나올림픽 주경기장, 인근 길가 언덕에 조성된 황영조 선수 우승 기념존 등을 둘러보고, 유명한 몬주익 분수쇼를 내려다볼 수 있는 카탈루냐 미술관 방문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  바르셀로나 항의 야경

 

 -다음에 계속-

 

▲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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