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 용서받지 못할 죄

<더 랍스터(The Lobster)>는 두 가지 금지된 가능성을 보여준다. ‘숲’과 ‘호텔’이란 잔혹한 두 이미지는 강요만 있다면 ‘사랑’의 이름으로든 ‘자유’의 이름으로든 결국 본성을 가두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6-04-07 09: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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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양스양(杨时旸)


모든 반(反)유토피아작품과 마찬가지로 <더 랍스터>는 결국 우화다. 어떻게 보면 독신이 ‘죄악시’ 되고 무시당하며 차별 받는 중국관객에게 특히 어울린다 하겠다. <송곳니(Dogtooth)>의 지오르고스 란디모스(Giorgos Lanthimos) 감독은 이러한 ‘독신 죄’의 모습을 최고의 경지로 밀고 나갔다. 


독신인 사람들이 한 호텔에 집결되어 제한된 시간 안에 짝을 찾아야 하며 실패할 경우 동물로 변해 숲 속에서 이들 독신자에게 잡혀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독신자들은 ‘동물’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인간’ 으로서의 시한이 하루씩 늘어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숲으로 다시 쫓겨난다.


모든 반(反)유토피아작품의 전형적인 설정과 마찬가지로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반역자다. 그들을 ‘죄인의 몸’과 ‘동물’사이에서의 선택을 거부하며 숲에서 자신을 단련해 외부에 저항한다. 이런 식으로 재미있는 대비가 생겨나면 이론적으로 ‘반역자’들은 ‘자유’의 상징이 되어 강압적인 생활방식의 폭력에 저항하지만 사실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에게는 성(性)과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또 다른 잔혹함이다. 그들은 적과 싸우는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적과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트루 디텍티브(True Detective)2>에서 언제든 무너질 위험이 있는 경찰 역을 맡았던 콜린 파렐(Colin Farrell)이 이번 작품에서는 더욱 비참한 처지의 남자주인공을 역을 맡았다. 술 배가 나오고 근시안경을 낀 중년남성이 ‘독신죄인’의 일원이면서도 결국 호텔을 벗어나 반역자 진영으로 향하지만 반역자와 사랑에 빠져 다시 도망간다. 사랑의 본질은 자유로운 선택인데 어떤 강압이 가해지면 이 자유가 파괴된다. 배우자를 만나기를 강요하는 것도, 사랑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 <더 랍스터(The Lobster)>의 스틸 사진

<더 랍스터>는 두 가지 금지된 가능성을 보여준다. ‘숲’과 ‘호텔’이란 두 잔혹한 이미지는 강요만 있다면 ‘사랑’의 이름으로든 ‘자유’의 이름으로든 결국 본성을 가두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반드시 배우자를 만나야 하는 감옥과 같은 호텔에서 사람들은 괴팍함과 거짓말로 연기를 한다. 반어적으로 그 세상에서 거짓말 하는 것은 불법으로 화를 면하기 위해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난 듯 가장할 수 없으며 두 사람이 진짜 사귄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문제는 외부의 강요 속에서 진정한 감정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반역자가 호텔 사장실에 쳐들어와 부부 중 누가 살고 죽을지 선택하라고 하자 사장의 남편이 그녀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둘은 매일 부부금슬이 좋은 진심을 자랑하는 부부였다. 총에는 총알이 들어있지 않았지만 빈 총소리가 서로간의 거대한 거짓을 관통한다. 다른 한 편 반역자의 진영도 마찬가지로 거짓말이 유행한다. 사랑하는 남녀는 비밀수화를 만들어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은밀히 사랑을 전해야 한다. 호텔에서 다를 바 없는 억압이다. 결국 비밀스런 사랑이 드러나면 반역자의 두목이 가차 없이 여자의 눈을 멀게 한다. 

 

사랑하는 것과 고독을 즐기는 것은 사리에 맞게 진행될 수 없고 자유의 기초는 이미 해쳐져 끊어졌다.
최근 반(反)유토피아 소재가 인기지만 대부분은 이 어두운 소재를 유치화해 기본적으로 반(反)유토피아의 아내를 통해 젊은 시절의 사랑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헝거게임(The Hunger games)>과 <다이버전트 (Divergent)>가 그렇다. 반면 이 영화는 상업화된 주류 블록버스터와 분명히 다른 야심을 가지고 전형적인 반(反)유토피아 소재로 돌아온다. 


그리스감독 지오르고스 란디모스는 권력이 사람을 해치는 이러한 소재에 각별한 애정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우화로 이야기하는 서술방식에 빠져있다. 이 영화의 장단점은 매우 명확하다. 아니면 다르게 이야기해서 감독은 이렇게 분명하고 절충되지 않는 방식을 사용해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상징적이고 긴장감 있는 배경음악과 기계적이고 역사이야기를 하는 식의 대사로 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화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래서 약간 침울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밝다. 남녀주인공이 호텔과 숲에서 나와 도시로 돌아가 카페에 앉아있을 때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과 다시 한 번 ‘맞추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분명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공통점을 찾아 이러한 사랑의 합법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예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화장실에서 주저하던 남자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지는 모른다. 여자가 어쩔 줄 몰라 않아있는 카페 창밖의 햇살이 찬란하다. 사람들은 짝을 지어 걸어가야 하지만 사랑이란 가면 뒤에는 누구나 냉랭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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