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샤오쑤, 개혁의 정도II

멍샤오쑤(孟晓苏)는 8년간 전(前)국가지도자 완리(万里)의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격동의 시대 중대한 개혁개방정책 제정 및 시행과정을 몸소 겪었으며 단호히 개혁을 추진했던 옛 지도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 중국부동산그룹(中房集团)에 오랫동안 재직하면서도 그의 ‘개혁본색’은 퇴색하지 않았고 ‘중국부동산의 아버지’라 불린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10-05 09: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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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왕췐바오/뤼톈린

 

 

중난하이로
 

멍샤오쑤(晓苏, 우측 첫 번째)와 완리(万里), 볜타오(边涛)의 사진
1986년 완리(万里)를 수행해 칭다오(青岛) 해양소(海洋所) 시찰

1988 7, 리커창(李克强, ) 멍샤오쑤(晓苏, ), 타오징저우(陶竟洲)



 

 

 

 

 

 

 

 

 

 

 

 

 

 

 

 

 

 

 

 

 

 

 

 

 

 

 

 

 

 

 

 

 

 

 

멍샤오쑤는 1982년 대학 졸업 후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中宣部, 이하 ‘선전부’) 신문국()으로 파견되어 신문의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중앙정부가 ‘사상해방(思想解放)’을 주장하였으나 신문은 여전히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보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선전부가 개최한 청년임원좌담회에서 멍샤오쑤는 청년의 지혜와 재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고 사상이 충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등 업무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함께 자신도 개혁의 현장에서 일하겠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시 선전부 덩리췬(力群) 부장 역시 “매우 일리 있는 비판이라 생각한다”라며 새삼 높이 평가했다.


선전부에 1년여 기간 재직한 후 멍샤오쑤는 중난하이로 파견되어 국가지도자의 비서 직을 맡았다. 여기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멍샤오쑤의 아버지는 해방전쟁 참전병사이나 그의 할아버지는 국민당 장군을 지내셨다. 당시 ‘3대를 조사’라는 정치심사요구에 따르면 멍샤오쑤는 중앙정부사무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으나 당시 후치리()주임의 개방적인 인재등용에 힘입어 중앙정부 사무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후치리 주임께서 이런 임원은 제11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三中全)에 대한 애착이 있을 것이고, 그의 애착이 나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씀해 주셨어요.”라고 말했다


그 후 당시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 완리가 멍샤오쑤를 자신의 비서로 지명하면서 멍샤오쑤는 1983 5월 사무청 근무 2년째 되던 해에 완리의 수행비서로 정식 임명되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갔어요.” 멍샤오쑤는 완리가 베이징 부시장 직에 있었을 때 완리의 아들과 같은 공장에서일 하며 아는 사이었다고 말했다


멍샤오쑤의 아버지는 그의 대학 시절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멍샤오쑤는 나이가 완리 아들과 비슷해 완리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여겼다. 완리와 그의 아내 역시 멍샤오쑤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그의 성장을 관심으로 돌보고 있다.


멍샤오쑤는 논리적이고 기억력이 뛰어나다. 대화 중에 오래 전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 생생하고 자세하게 그려낸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이 완리의 비서를 하며 생긴 습관이라며 “완리 선생님은 연설할 때 원고도 필요 없었어요. 중요한 연설만 생각한 다음에 두세 줄 쓰시죠.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선생님은 한 시간 넘게 연설을 하시거든요.” 라고 말했다


완리가 지도자 직위에서 내려온 후 멍샤오쑤가 그를 찾아가 “더 이상 연설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의 혁혁한 공로는 역사책에 이미 기록되었으니까요.”라고 이야기하자 완리는 크게 웃었다


“퇴직 후에도 사람들에게 잊혀질까 두려워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완리의 업적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해요. 선생님과 그 연배의 지도자들이 시작한 개혁사업이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발전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죠.” 멍샤오쑤의 말투에 잔잔한 슬픔이 묻어난다. 

도마 위에 오른 시장경제 관점


1988
년 완리의 지지로 멍샤오쑤는 다시 한 번 베이징대학으로 돌아가 유명한 경제학자 리이닝(以宁)의 제자로 경제학석사를 공부했다. 그의 동기 중에는 현재 국무원총리 리커창과 리위안차오(李源潮) 부주석도 있었다. 졸업 후 멍샤오쑤과 리커창은 리이닝 밑에서 박사공부까지 계속했다


멍샤오쑤는 “개혁개방시기에 새로운 것들도 많고 새로운 이론문제도 자주 만나면서 체계적인 이론을 공부하고 깊이 연구해야겠다고 느꼈다.”라며 “완리 선생님이 추진하신 농촌 연대책임제 개혁은 사실상 생산권이론과 관계된다.”고 기억했다


훗날 농촌의 연대책임제는 도시로까지 확장되어 ‘포자진성(包字)’으로 불렸다. 서우강()과 얼치(二汽)는 도급제를 시범운영 한 후 생산력이 크게 발휘되고 서우강의 수익이 급증하면서 당시 베이징 재정의 25%에 달하는 세금을 내기도 했다


멍샤오쑤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완리 선생님의 관점이 지분제가 아니라 책임제에 국한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책임제에서 지분제로 전환될 것을 당시에 이미 예측하고 계셨다.”고 전했다


1988
년 완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임직했다. 당시 리이닝은 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이었다. 완리는 멍샤오쑤에게 리이닝이 지분제의 대가이니 잘 배우라고 일렀다


중국공산당 제12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경제의 틀을 제시한 후 시장경제에 관한 토론이 각처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멍샤오쑤는 “이들 개혁개방 지도자는 1980년대에 이미 시장경제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발상을 마련하고 기존의 계획경제체제 지켜왔다.”고 떠올렸다


멍샤오쑤는 자신의 석사논문에 이 시기의 역사를 적었다. ‘기점모델’은 규범화되지 않은 계획경제로 중국의 낙후된 경제상황으로는 구 소련(苏联)과 같은 계획경제체제를 이룰 수 없다. 그 후 두 체제를 병행하는 ‘과도기모델’로 들어섰으며 개혁의 ‘목표모델’은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기술한 ‘기점모델-과도기모델-목표모델’이다. 그의 석사논문은 높은 점수로 통과된 후 전문간행물에 발표되었으나 <인민일보(人民日)>와 잡지<구시(求是)>의 비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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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의 단행본 <진리의 추구(理的追求)> 1면에 <오늘날의 개혁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前改革问题之我)>라는 제목의 글로 멍샤오쑤가 논문에 제시한 시장경제개혁론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는 분명히 자본주의 노선을 가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반봉건, 반식민지로 돌아가자”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 밖에 “개혁이 깊이는 돌을 몇 개 만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수역으로 들어왔다.”는 그의 또 다른 관점 역시 “개혁을 익사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다”라며 비난을 샀다


1991
9 2 <인민일보>는 멍샤오쑤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실었다. 그러나 1992년 봄 덩샤오핑(小平)이 남순강화(南巡讲话)로 개혁개방 대업의 풍조를 만들면서 모든 혼란이 잠시 그쳤다


기업운영이 더 좋은 선택일 수 있어

멍샤오쑤와 동기들의 논문집출판을 기다리면서 안전을 위해 ‘정치를 아는’ 지도교수 리이닝은 멍샤오쑤와 리위안차오의 논문을 대폭 수정해 ‘시장경제’와 ‘개혁이 깊은 수역으로 들어섰다’ 등 논쟁의 여지가 있는 내용은 모두 삭제했다. 최종적으로 출판된 논문집 <번역으로 가는 전략적 선택(走向繁选择)>에서 이들의 관점은 처음보다 예리하지 않게 바뀌었다. 리커창의 석사논문<농촌공업화: 도시-농촌의 이원화된 구조를 바꾼다(村工化:改二元结构)>은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견해로 당시 큰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다


완리의 비서로 8년을 보낸 후 멍샤오쑤는 중난하이를 떠나 국가상품검사국() 차장으로 발령되었다. 2년째 되던 해에 국무원의 지도자가 그를 찾아 승진을 시켜주고 싶다 했으나 멍샤오쑤는 기업으로 가고 싶다고 밝혔다


멍샤오쑤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경제건설현장에 직접 나가 기업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가 당 전체적인 공감대를 이루고 제가 비난 받았던 일도 지나갔지만 앞으로의 정치환경이 1980년대와 같지 않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저로서는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죠.”라며 “젊을 때는 누구나 잘난척하고 거만하잖아요.”라고 덧붙였다


1992
년말 멍샤오쑤는 바라던 대로 중국부동산산업개발그룹 본사의 사장으로 발령되었다. 얼마 후 그는 주택제도를 개혁할 것을 제안했다


“중국부동산그룹에 있으면서 당시 전국 1위인 그룹의 산업지위를 빌어 주택건설을 국민경제의 새로운 성장포인트로 삼을 것을 제안했는데, 국무원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바로 이어 국가체제개혁위원회(体改委), 건설부(), 국가계획위원회()와 국가과학위원회(科委)의 참여로 과제 팀을 구성해 새로운 성장포인트 문제를 연구하고 부동산개혁방안을 계획하기 시작했죠.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멍샤오쑤가 말했다


부동산개혁방안에서 멍샤오쑤는 “주택이원병행’의 개념을 내놓았다. 정부는 저가임대주택을 건설하고 시장은 상품주택을 제공하되 상품주택을 위주로 상품주택공급업체에 분배해 저소득가정에 저가임대주택을 공급한다는 내용이다


처음의 개혁방안에서는 ‘경제적용방(经济适用房-서민들을 위한 아파트)’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 개념은 부동산개혁을 발표할 때 추가되었다. 부동산개혁을 추진하고 각 지방 주민들이 주택을 구매할 때의 표준가격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멍샤오쑤에 따르면 “이는 부동산개혁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당시 ‘경제적용방’을 규정 없이 저소득가정에만 판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동산개혁 초기 국민들이 주택을 구매할 것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의 주택구매를 활성화 하는데 큰 힘을 쏟던 때였다.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주택을 구매해야 저소득계층이 보장형 주택을 구매할 수 있는데, 저가임대주택문제의 경우 담당부처가 장장 9년동안 건설하는 것을 잊고 있던 상황이었다.


멍샤오쑤는 자신이 ‘이원병행’개혁방안을 분명히 제안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가 개혁방안을 다시 수정한다면 어떻게 수정할 것이냐는 매체의 질문에 그는 “한 자도 틀린 것이 없으니 한 자도 수정하지 않겠다.”라고 확고하게 대답했다


부동산개혁방안에는 주택담보대출, 주택담보대출보험, 주택준비금, 국가주택은행 등 금융상품이 몇 가지 제시되었다. 이 중 앞의 몇 가지는 바로 시행되었으나 ‘국가주택은행’만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해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우리는 부동산개혁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개혁방안에 제시된 ‘국가주택은행설립’ 등의 내용은 많은 나라들의 경험을 참고한 것이다. 중국도 이러한 금융기관이 있어야 한다. 당시 건설부는 적극적이었으나 은행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주택은행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은행의 부동산부서와 준비금예금을 떼어내 새로운 은행에 유입해야 하는데, 은행들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이를 원하지 않는다. 그 결과 중국은 미국의 패니메이(Fannie Mae)나 프레디맥(Freddie Mac), 일본의 주택금융공고, 한국, 브라질 등 나라의 국가주택은행처럼 중·저소득계층을 위한 주택은행이 없다.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멍샤오쑤가 말했다. 그는 또한, “현재 전국의 주택준비금이 4조여 위안 가량에 달하며 저소득계층의 주택보장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국가의 목표로 국가주택은행 설립시기가 완벽히 마련되었다.”고 덧붙였다


멍샤오쑤는 부동산산업개혁의 선구자로서 ‘중국부동산의 아버지’라는 호칭도 얻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의식과 담력이 선임 지도자 완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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