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 조심스러운 도약 I

런정페이(任正非) 화웨이 회장은 이런 문화를 ‘바보문화’라 칭했다. 화웨이가 고수하는 기술혁신의 길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바보같이 몰입하고 바보같이 해내라’이다. 하지만 그는 맹목적인 혁신이나 혁신을 위한 혁신은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가치 있는 혁신을 추구합니다. 기술혁신과 관리 시스템이 없는 ‘바보 같은 몰입’은 진정한 제품과 시장 경쟁력을 갖출 수가 없으며 저가와 가격전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6-08-10 09: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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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기자/민제(闵傑)
 

▲ © 2016년 1월 초 미국 라스베가스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 CES에서 허강(何剛) 화웨이 소비자 사업 스마트폰 대표가 새로 출시한 스마트폰을 선보이고 있다. 그림/제공
베일에 감춰졌던 화웨이가 베일을 벗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동안 화웨이는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역시 전세계 통신업계에서 가장 조심스런 기업가로 평가되었다. 화웨이는 전세계에서 상장을 하지 않은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500위 기업에 든 기업이다. 오랜 시간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 데다 사업의 근간이 B2B였던 화웨이는 대중의 시선 밖에 있던 기업이었다. 

 

그러나 2012년 무렵부터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변화의 첫 번째 원인은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성장을 거듭하는 화웨이의 배경에 대한 추측이 끊이지 않자 화웨이는 투명성 제고를 위해 노력할 필요를 느꼈다. 두 번째는 화웨이의 컨슈머 업무의 영향이 컸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화웨이 휴대폰 때문이었다.


4년 연속 화웨이 휴대폰 출하량은 2011년 2,000만 대, 2012년 3,200만 대, 2013년 5,200만 대, 2014년 7,500만 대로 무서운 성장세를 보였다. 


2015년 화웨이 휴대폰 출하 대수는 1억 800만 대를 기록해 출하 대수가 1억이 넘는 최초의 중국 국내 휴대폰 제조업체로 부상하면서 애플과 삼성을 뒤잇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화웨이 내부엔 런정페이 회장이 한 말이 유행했다. 바로’머리는 고객을 향해, 엉덩이는 상사를 향해’이다. 런정페이는 이 말처럼 화웨이 내부 깊숙이 ‘고객중심’이란 화웨이 유전자를 주입했다. 요즘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1억 800만 대 출하량은 몇 억에 달하는 전 세계 휴대폰 소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비자 수요를 어떻게 충족할지, 실제 지불 의사를 어떻게 예측할지, 화웨이가 베일을 벗고 어떻게 세상 앞에 설지, 화웨이에게 소비자를 매료시킬 방법은 무엇인지 나아가 언제 애플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등 모든 문제는 오늘날 스마트폰 시대에서 화웨이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숨겨왔던 비장의 무기


허강(何剛) 화웨이 소비자 사업 스마트폰 대표는 최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화웨이에서 새로 출시한 P9 사용자 중 대부분이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워터마크 기능을 켠다는 사실이다. 워터마크 기능을 켜면 사진 위 ‘HUAWEI P9 LEICA DUAL CAMERA’ 글자가 찍히면서 화웨이 P9의 라이카 듀얼 카메라로 찍은 사진임을 증명한다. 


P9가 출시된 후 허강 대표 역시 SNS에 사진 올리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다. 가끔은 작품처럼 찍기도 하는데 도시락 채소의 색감을 더 푸르게 보이도록 찍고 밑에다 ‘도시락도 예쁘게 찍기 없기’ 라고 귀엽게 코멘트도 남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고품격 카메라의 대명사였던 라이카는 사용자에게 품격과 지위를 부여했다. 화웨이는 스마트폰에 처음으로 라이카 렌즈를 적용했고 이는 P9휴대폰의 최대 강점이 되었다. 이 비장의 무기를 세상에 공개하기 까지 화웨이 P9 팀은 2년을 참아야만 했다.


“2년 전부터 제휴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양측에게 모두 고민거리가 있었죠. 화웨이는 수준 높은 촬영을 소비자에게 선사해주고 싶었고, 카메라가 주력 사업인 라이카는 스마트폰 업계에 발을 들이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스마트 폰과 결합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라며 말한 허강 대표는 중국신문주간 인터뷰에서 양측 모두 제휴 의사를 밝힌 것은 2년전 위청둥(余承東) 화웨이 컨슈머 업무 CEO와 라이카 회의에서 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라이카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위청둥 CEO가 줄곧 놓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라이카 브랜드를 붙였다고 한들 진정으로 촬영에 대한 고객의 체험을 향상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라이카가 무료로 브랜드를 제공한다고 해도 협력하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했다.


화웨이가 자신만의 추구하는 바가 있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라이카도 고민이 있었다. “처음 접촉할 때부터 모두 조심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라이카가 화웨이로 인해 사양길로 접어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가오밍(高明, 가명) 화웨이 P시리즈 스마트폰 팀장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양측이 정식으로 제휴를 체결하기 전 약 1년간 협의기간을 거쳤고 서로 탐색전을 펼쳤다고 했다.

가오밍 책임자에게 라이카와 협력은 힘들고 위기가 많았던 시기로 기억된다. 첫 번째 위기는 하드웨어 부분이었다. 라이카가 제시한 규격과 요구를 화웨이는 렌즈의 디자인에 적용해야 했다. 초기 디자인 과정에서 거의 모든 렌즈를 버려야만 했고 제품 합격률에 심각한 영향을 줬으며 비용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처럼 높은 폐기율을 두고 화웨이는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이처럼 큰 낭비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휴대폰 합격률을 올리지 못한다면 향후 휴대폰 생산이 힘들어질 텐데 소비자 가격은 어떻게 책정해야 할지, 지나치게 비싸면 컨슈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게 분명했습니다.” 가오밍 팀장은 당시 스트레스가 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리스크를 인식하고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즉각 전담팀을 꾸려 품질 향상 과정에서 나타나는 합격률 문제를 해결했다. 듀얼 렌즈 장착을 위해 렌즈부터 모듈 나아가 바디 조립 방법까지 화웨이와 라이카의 엔지니어는 공동으로 디자인을 연구했고, 함께 생산공장에서 합격제품의 엄격한 기준치를 적용하는 등 전 과정에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결국 디자인 조정과 제조기술 향상을 통해 합격률을 높였다.


알고리즘 테스트와 품질 향상도 문제였다. 촬영속도를 높이기 위해 가오밍 팀장은 3가지 방법을 연구했다. 우선 듀얼 렌즈의 초점 조준 속도를 높였다. 다음으로 P9에 독자 개발한 ISP 및 화면 전용 알고리즘 DSP를 탑재했다. 전문 제작된 ISP는 CPU 외 독립된 존재로 실시간으로 심도정보를 계산한다. 마지막 방법은 레이저이다. 레이저는 근거리에 뛰어나며 원거리 초점 조준에도 도움이 된다. 


”듀얼 렌즈 촬영 알고리즘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화웨이는 일찍부터 이 분야에 뛰어들었고 2015년 제품 생산에 성공했습니다.”라고 말한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휴대폰 개발팀 가운데 촬영팀의 경험이 매우 풍부하며 이미 특허 수십 건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라이카의 높은 요구치에 부합하기 위해 화웨이는 품질보장, 합격률 향상에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일년간 노력을 기울인 결과 두터운 상호신뢰를 형성했고 양측은 제휴를 체결하게 되었다. 


라이카 브랜드 자체가 곧 품질 보증수표인 동시에 높은 비용을 의미한다. 라이카 SL 한대의 가격은 BMW 1대와 맞먹을 정도이다. 라이카 렌즈를 탑재한 화웨이 휴대폰 판매가를 어떻게 책정해야 하는지 고가 전략을 통해 수익을 보장해야 하는지 아니면 입소문을 노리고 저가 전략으로 시장점유율을 늘려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P9 해외판매용은 (3GB+32GB)599유로(약 4,415위안)이고, 중국 국내판매용은 3,188위안이다. 중국 국내판매용 가격이 낮은 이유는 화웨이 P시리즈 Mate 시리즈와 가격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판매가를 책정한 데는 유럽의 세금이 높은데다 라이카가 유럽에서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1000위안 높다고 해서 유럽 내 판매에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내시장에서는 이윤을 희생하더라도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중국 국내 소비자가 과거 고가 때문에 사용할 수 없던 라이카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해외 통신사 임원들과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는데 모두 너무 싼 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허강 대표는 중국신문주간과 인터뷰에서 화웨이도 라이카 렌즈를 초기 모든 시리즈 제품에 적용해야 할지 아니면 프리미엄 모델에만 적용할지 망설였는데 통신사의 이런 의견을 들은 후 전체 시리즈에 적용하기로 최종결정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하면 소비자가 확실히 제품의 성능 향상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P9 출시 후 한 인터뷰에서 위청둥 CEO는 "반 년이나 앞서 있기 때문에 iPhone7의 시장경쟁력이나 촬영 효과 모두 우리를 뛰어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경쟁 라이벌보다 반 년 일찍 더 뛰어난 제품을 출시했기에 가격 책정을 너무 낮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듭니다."라며, P9가 하반기 출시되는 iPhone을 현저하게 따돌릴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다.

▲ © 5월 13일 베이징의 한 화웨이 매장에 전시한 화웨이 P9시리즈 그림/IC

전환의 고통

 

허강 대표는 P9 출하량이 1000만 대를 넘을 거라고 예측했다. 화웨이 스마트폰이 중고가 시장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해외시장 확장이 필요 하며 P9가 바로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 레노버, 샤오미가 중고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다 어려운 상황에서 인터넷에 주력하는 휴대폰 업체는 가격전쟁의 늪에서 완전히 헤어나왔다고 볼 수 없다. 현재 중국 국산 스마트폰의 미래를 짊어질 주자로서 화웨이가 주목받는 상황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4년, 5년 전만 해도 화웨이 스마트폰이 화웨이그룹 사업 중 부실한 성적표를 면치 못했던 일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런정페이 회장이 1987년 화웨이를 창립할 당시 자본금은 2만 1,000위안에 불과했다. 직원은 6명에서 17만명이 되었고 2015년 매출액 3,950억 위안 가운데 60%가 해외시장에서 창출된 금액이다. 화웨이 제품은 이미 170여개 국가로 판매 중이며 전세계 1/3 이상 사용자를 위해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통신 분야에서 화웨이는 백 년 동안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던 벨 연구소의 루슨트를 무찔렀다. 2013년 화웨이 영업수익이 처음으로 세계적 통신업체 에릭슨을 뛰어넘었다. 무선, 송신, 코어, 데이터통신, 업무와 소프트웨어 등 기존 분야에서 모두 전세계 통신업계의 선두로 우뚝 섰다.


하지만 오랜 기간 외부 노출이 적었던 탓에 화웨이의 배경에 대한 외부의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고 심지어 2012년 미국 국회가 화웨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기까지 했다. 결국 화웨이의 미국 주류시장 진입이 막혔다. 그때부터 화웨이는 언론,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했고 각 부문CEO 모두 인터뷰에 열을 올렸으며 런정페이 회장 역시 대중과 만나는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창립 초기부터 화웨이는 줄곧 B2B(business to business) 사업에 매달렸다. 이런 사업모델로 화웨이는 운영업체에게 기지국과 교환기를 제공했으며 고객 역시 단말기 소비자가 아니었다. 


“5년전 엔지니어, 중국인이 아니었다면 화웨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장샤오윈(張曉雲) 화웨이의 컨슈머 사업 CMO는 최근 런던 비즈니스 스쿨을 방문할 당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화웨이가 세계2위 통신 네트워크 공급업체로 어떻게 부상했는지 또한 세계 1/3 고객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소비자가 왜 아직도 화웨이에 대해 잘 모르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엄격히 따지면 2011년 이전 화웨이는 컨슈머 사업에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상 화웨이는 휴대폰 제조분야에 이제 막 진출한 초짜였고 2003년부터 통신업체를 위해 브랜드가 없는 단말기를 생산했다.


당시 휴대폰 제조 분야 역시 B2B 사업이었다. 통신사가 주요 고객이었고 시장과 컨슈머에 대해 파악을 한 후 휴대폰 규격을 정하면 화웨이가 맞춤 생산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통신사가 필요한 걸 화웨이는 제공하며 오로지 통신사를 위해 생산했습니다. 통신사는 가격이 저렴하지만 사양이 높은 제품을 원했습니다.” 허강 대표는 중국신문주간에게 최근 10년간 화웨이는 저가 휴대폰 생산 경험을 쌓아왔다고 말했다. 초기에 이런 사업모델은 성공했다. 2006년~2008년간 노브랜드(No brand) 휴대폰 생산이 화웨이 단말기 사업에 수익 창출에 많은 기여를 했다.


허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점차 많은 업체들이 해당 사업에 뛰어들면서 브랜드 없는 생산과 통신사와 협력은 가격을 낮췄고 제품 규격은 오히려 높아져 수익이 줄어들게 되었다. 


터닝 포인트는 2011년이었다. 허강 대표는 2011년 말 산야(三亞)에서 열린 화웨이 최고임원조직관리팀(EMT) 회의에서 런정페이 회장이 ‘화웨이는 고객은 최종 소비자이며 향후 B2C로 전환해 중고가 시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확고한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화웨이 사업 구조도 사업모델이 전환됨에 따라 근본적 재조정에 들어갔다. 2011년 화웨이는 다년간 유지한 조직구조를 바꿨고 회사의 업무부처를 △통신사, △기업, △컨슈머 그룹(BG) 3대 사업 그룹으로 재편성하고 독립 운영하면서 직접 고객과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위청둥 CEO는 이 때부터 컨슈머 사업에 총괄하면서 컨슈머 사업의 CEO직을 맡게 되었다. 통신업계에서 위청둥 CEO는 늘 논란의 중심에 서있었는데 할말을 하는 그는 업계 내에서 허풍쟁이라고 불렸다. 정직하고 솔직한 성격이라 예상을 뛰어넘는 발언을 하는 그는 소극적 일처리로 유명한 화웨이에서 특별한 케이스의 인물이었다.


애플, 삼성부터 HTC, 레노버까지 휴대폰 제조업체 모두 위청둥 CEO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위청둥 CEO는 여러 차례 솔직한 발언으로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런정페이 회장이 한번은 내부회의에서 “화웨이에서 가장 허풍을 잘 떠는 사람은 아마 위청둥 CEO 같습니다.”라고 농담을 했는데 이에 대해 위청둥은 “사실 허풍을 떤 게 아니라 겸손하지 못한 겁니다.”라고 해명했다.


위청둥 CEO가 컨슈머 사업을 총괄한 후 그는 허강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휴대폰 사업 부문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전화를 받은 후 허강 대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곁에서 이를 들은 그의 아내는 이해할 수 없어 “왜 이렇게 빨리 승낙하는 거에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가 이해하지 못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허강은 시안(西安) 출생으로 1998년 입사 후 화웨이 무선 네트워크 제품 라인에서 일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11년은 무선 제품의 전성시대 였다고 한다. 아내의 질문에 허강 대표는 회사가 새롭게 휴대폰 사업을 준비 중이라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당시 화웨이 직원들 조차 자사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았죠. 대부분이 애플 휴대폰을 사용했습니다.” 휴대폰 사업을 한다는 생각에 허강 대표는 들떴다. “먼 훗날 제 아이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주위를 둘러보렴. 사람들이 손에 든 휴대폰이 아빠가 만든 화웨이 휴대폰 이야’라고요.”


휴대폰 사업부로 옮긴 후 허강 대표는 화웨이 휴대폰 제품이 출하되면 직접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 파트너를 통해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통신사와 협력하게 되면 일정한 비율로 보조기기를 제공해야 하고 통신사 자체에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허강 대표는 이런 구조에서 연구개발자나 영업 관계자 상관없이 모두 ‘팔 면 끝이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고 말했다.


B2C가 분명히 아니었다. 소비자의 불만은 통신사선에서 막히게 되고 화웨이는 휴대폰 생산업체에 멈춰 소비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10년 동안 휴대폰을 만든 화웨이가 이런 상황이라니……’ 허강 대표는 충격에 휩싸였다. 위청둥 CEO는 단말기 사업 총괄 후 휴대폰 제품라인의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고, 저가 단말기 스마트폰과 노브랜드 기기 사업 중 전년 총 출하량의 절반이 넘는 3,000만 대 사업 중단을 결정했다. 통신사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 저수익 늪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 


“당시 많은 판매회사들이 위 CEO에게 전화를 걸어 오더가 또 취소되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허강 대표는 중국신문주간과 인터뷰에서 당시 굳게 마음을 먹고 취소되었으면 취소된 것이며 화웨이 브랜드를 만들어 낼 것이라며 팔지 않아도 상관 없다고 했다고 한다.


화웨이는 십년간 누적한 노브랜드 기기 생산능력을 전부 처리 했다. 이런 급진적인 방법 때문에 화웨이 내부에서 조차 의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둑한 배짱은 위청둥 CEO는 논란의 중심이 되길 자처했고 며칠에 한번씩 이사회에서 해명을 해야만 했지만 그가 곧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공개시장에서 화웨이 고유의 브랜드 휴대폰을 생산하기로 결정한 후 위청둥 CEO와 소비자 사업부 전체의 삶은 더욱 고단해졌다. 2010년 화웨이는 시범적으로 자사 브랜드 IDEOS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휴대폰을 출시했다. 스마트폰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던 상황에서 300만 대의 출하량을 올려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저가전략을 택한 탓에 수익성이 낮아 IDEOS는 최종적으로 내부의 지원을 얻지 못해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첫 번째 테스트 성적은 평범했다. 장샤오윈(張曉雲) 화웨이 소비자 사업 CMO은 당시 박수 갈채보다는 의문의 눈초리가 더 익숙했다고 떠올렸다. 분석가들은 B2B 전문기업이 과연 B2C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 당시 어떤 브랜드도 B2B와 B2C 이 두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업계에서는 절대 넘지 못할 산이었기 때문이다. 


2012년 화웨이는 다시 한 번 스마트폰 P1을 2,999위안에 선보였다. 우선 미국시장에서 제품을 발표한 후 중국시장에 선보이면서 중고가 시장을 노렸다. 그 후 다시 D2를 3,999위안에 출시했다.


두 가지 스마트폰 제품의 책임자였던 양판(楊帆)은 “스마트폰 부품 공급업체는 피처폰과 완전히 다릅니다. 피처폰 생산에 10개 정도 새로운 부품이 들어가는데 P1을 만들 때는 50개로 순식간에 증가했기 때문에 문제가 끊이지 않아 당시에는 소방대원처럼 급한 불 끄느라 이리 저리 뛰어다녔죠.” 라며 정신없이 바빴던 당시를 떠올렸다.


두 가지 스마트폰은 당시 화웨이에게 있어 프리미엄 스마트폰으로 향할 수 있는 열쇠라고 여겨졌지만 납품주기, 루트전략, 가격책정 시스템상 이런 저런 문제가 발생했다. P1, D1 두 가지 스마트폰 모두 판매되지 못했고 판매가 대폭 하락 후 판매 실적도 참담했다. 직후 출시된 P2, D2 휴대폰은 마찬가지로 기대에 못 미쳐 Mate1, Mate2 역시 평범한 성적을 거두었다. 


위청둥 CEO 전략도 의심을 받았다 통신사 시장에서 공개 시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화웨이가 저가전략을 택해야 할지 아니면 고가기기로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지 말이다.


허강 대표도 한때 의구심을 품었다. “당시 CEO 였던 쉬즈쥔(徐直军)이 저에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는 화웨이 브랜드를 만들려면 반드시 화웨이 품격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는 소비자가 저가기기에 대해 요구치가 낮으니까 고가기기보다 조금 부족해도 되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쉬즈쥔은 “당신들의 휴대폰 사업을 접는 한이 있어도 품격이 떨어지는 화웨이 브랜드를 만드는 상황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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