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개방 40년의 중국 국제법 선도자

종합적인 국력과 국제적 영향이 나날이 상승함에 따라 중국은 주요 국제기구와 국제협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쪽이 되었다. 중국국제법 전문가도 점점 더 무대 중앙에 서게 되었으며 다자간 틀에서의 국제법 분야의 작업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정지웅 기자 newschina21@naver.com | 2019-03-02 16:53:48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정지웅 기자]개혁개방 40주년 경축대회가 열린 인민대회당에서 ‘외교 분야 국익의 충실한 수호자’로 평가 받은 사지우융은 현장에 나가 개혁선봉 메달을 받지 못했다.

 

▲ 사진/본지기자 둥제쉰(董洁旭)
사지우융(史久镛)

 

그의 가족들은 올해 아흔을 넘긴 사지우융이 현장에 직접 나서기에는 몸에 무리가 따른다고 전했다. 반면 ‘대외개방 법제 건설의 적극적인 실천가’라는 칭호를 받은 장웨지오는 현장에서 상을 받으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것 같아 눈물이 핑 돈다”고 말했다.


92세의 지우융 전 국제사법재판소장과 75세의 장웨지오 전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 판사는 중공중앙과 국무원으로부터 개혁의 선봉에 선 두 국제법 분야의 전문가 칭호를 수여 받았다. 이들의 경력은 중국이 국제법 영역에서 점차 세계적인 표준에 접근해가고 세계에 영향력을 끼친 축소판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8년 12월 28일 외교부와 중국국제법학회가 공동 주최한 ‘개혁개방 40주년 국제법사업 간담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인 양제츠(杨洁篪) 중앙외사공작위원회 사무실 주임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중국은 40년간 국제법 보장과 개혁개방 추진에서 귀중한 경험을 쌓아왔다고 지적했다.(排版时最后一行不要留一个字哈,多蹿下来几个字)


관건은 ‘전문가’ 등용
중국은 1997년 홍콩에 대한 주권 행사를 재개했다. 사지우융은 중국 대표단의 법률고문으로 중-영 홍콩 문제 협상의 전 과정에 참여했으며 이후 중-영연방 연락팀의 법률고문을 맡았다.

 

당시 사지우융 등은 수많은 까다로운 법률상의 난제에 대해 영국 측 대표와 밤을 새워 가며 협상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개혁개방 초기의 국제정세와 국제규칙에 대한 국내 일부 부처의 이해부족에 따른 부처간 오해를 알아야 했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각 부처 간 이해관계를 파악해야만 했다.


영국이 홍콩을 점령하는 동안 홍콩은 영국 ‘식민지’로서 영국이 통상협정 창설 회원국이라는 점을 차용해 이미 협정 안에 들어 있었다. 중국과 영국의 홍콩 문제에 대한 협상기간 중 홍콩이 반환되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홍콩무역 총협정의 지위에 대해 국내 전문가들 사이의 의견이 한동안 통일되지 않았다.

 

일부 부처는 미국,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들의 중국 세계무역기구 가입 신청에 대한 지지의사 표명과 맹목적인 낙관주의 표명을 두고 1년 내지 반년 만에 중국은 성공적으로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할 수 있으며 미래에 홍콩이 관세무역 총협정 지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중국이 GATT회원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WTO에 가입한 후 홍콩은 중국의 일부분으로 조국과 함께 이들 국제기구에 가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지우융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홍콩이 먼저 단독 관세구역으로 본 협정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WTO가입에 대한 서방국가의 지원은 정치적 지지일 뿐 무역적 지지는 아니며 진검 승부를 할 때는 나라 대 나라로 담판을 해야 했는데 그때의 중국은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고 외국무역 개혁도 막 시작되던 때라 최종적으로 중국이 어느 정도의 개혁을 할지 다른 나라에서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담판 과정은 복잡하고 그 어려움은 예견할 수 없는 바 10년의 시간을 들여 담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당시 사지우융의 관점은 일부에서 ‘매국’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 사람들은 그 앞에서 직접 “리훙장(李鸿章) 외교의 시대는 한번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지우융은 이런 개인적 비아냥거림을 마음에 두지 않고 제네바 WTO 본부를 찾아 상황을 파악한 뒤 ‘홍콩과의 관세 및 무역을 위한 총협정’이라는 만 자 길이의 글을 발표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결국 국무부 최고 의사 결정가들은 홍콩이 단독관세구역의 신분으로 관세무역 총협정에 남아있을 것을 확정하고, 이후에도 ‘중국 홍콩’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데 동의하였다.


이 경험을 돌이켜볼 때마다 사지우융은 지금까지 조금 두려움이 남아있다고 했다. “홍콩은 자유항이라 불릴 만큼 경제 명맥이 수출입 무역에 있다.” 당초 총협정에 포함되지 못할 경우 그 후의 경제 발전과 번영의 어려움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사지우융은 “관세무역 협정에서의 홍콩의 지위가 반환되기 전에 해결되지 않으면 중국이 WTO 협상을 할 때 홍콩의 특수한 지위가 상대방이 흥정할 때 내세울 수 있는 ‘카드’가 되어 우리의 협상 과정을 더 길고 어렵게 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말했다.


중국에 대한 홍콩의 국제법적 지위가 가져온 도전은 단순히 경제무역 분야만이 아니었다. 홍콩의 위상과 반환을 성명에 어떻게 담느냐 하는 것도 중국 국제법학자들의 지혜를 시험해 볼 무대였다. 홍콩 섬, 쥬우룽(九龙), 신제(新界)에 대한 영국의 법적 지배는 영국이 청나라 정부와 맺은 ‘난징(南京)조약’과 ‘베이징조약’ 및 ‘홍콩의 경계를 넓히는 전조’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이 세 조약은 모두 불평등 조약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무효에 속한다. 중국은 홍콩을 영국이 불법으로 군사 점령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역대로 홍콩에 대해 주권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홍콩을 ‘포기’로 표현한 영국 측의 제안은 중국 측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줄다리기를 한 끝에 마지막 성명에서는 영국 불평등조약 포기라는 표현 대신 ‘역사가 남긴 홍콩문제’라는 표현을 썼고 중국 측이 주장하는 반환이란 표현을 썼다.

 

사지우융은 “‘반환’은 홍콩을 영국이 불법적으로 군사 점령한 것을 의미하고, 지금 돌려준다는 것은 결코 영국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우융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일국양제’(한나라 두 제도)를 통한 홍콩 문제 해결은 중국 조국 통일의 대업에서 지혜로운 한 걸음일 뿐만 아니라 중국이 국제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에는 전통적인 국제법 분야에서 불평등 조약의 개념이 없었고 불평등 조약에 대한 처리방법도 더더욱 없었다. 불평등 조약을 어떻게 취급하고 불평등 조약의 무효성과 불법성을 천명하기에 참조할 만한 선례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의 반환은 창조적이고 역사적인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중-영 홍콩 문제가 타결된 지 얼마 안 돼 중국은 1980년대 중반 경제무역 분야에서 국제법 체계에 통합되는 WTO가입 협상과 미-중 지적재산권 협상을 시작했다.

 

▲ 사진/본지기자 둥제쉰(董洁旭)
장웨지오(张月姣)


장웨지오는 WTO가입 협상과 미중 지적재산권 협상의 일선 실력자이자 개혁개방 초기 대외 경제무역 전문가 중 한 명이다. 1979년 7월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와 국가외국투자관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두 위원회는 국무원이 직접 이끌고 구무젠(谷牧兼) 부총리가 두 위원회의 주임을 겸했다.

‘중국공산당역사연구’ 2017년 10월호에 실린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설립과 그 역사적 역할 규명’이라는 글은 이 기구의 지도부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으며, 리란칭(李岚清)도 그 역할에 대해 높은 평가를 했다. “중앙개혁개방 전략결정이 열리게 된 계기는 덩샤오핑 동지가 ‘개혁개방의 관건은 사람을 잘 살리고 간부를 공들여 배양하는 데 있다’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에 중앙의 부름을 받고 국가 수출입위원회를 이끈 구무(谷牧)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며 그 전문가가 국가 수출입위원회를 꾸려 나가는 과정에 또 다른 전문가를 선발하여 기구를 탄탄하게 만들어갔다.”


장웨지오도 구무가 선발한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또 두 위원회에서 당시 시급히 필요했던 대외교섭 경제법률, 법규의 초안을 담당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시장경제에 필요한 법률이 당시에는 없었으며 중국의 국정에서 출발하여 국제협약과 관리를 참조하여 제로로부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두 위원회는 사상해방을 주창하고 법 제정 과정에서 장웨지오는 유엔, 미국, 유럽연합 등 법률 전문가들과 자주 교류했다.


12년에 걸친 중- 지적재산권 협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91년 우이(吴仪)가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미국으로 인솔단을 이끌고 갔던 첫 번째 협상이다. 중앙은 지적재산권 협상 전담 팀을 만들었고 우이는 장웨융 등 협상팀 팀원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며 준비했다.


대표단은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먹구름 낀 정치 분위기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협상 테이블에서 중국 대표단이 성의를 다해 이전 미중 지적재산권 양해각서를 충분히 중국이 이행했다고 설명하였지만 차기 계획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이뤄지지도 않았는데 미국 측이 협상을 중단한 것이다.


조셉 메시 미 무역대표부(USTR) 보좌관은 우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이번 협상은 이뤄질 수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원래 힐스 미 무역대표가 협상의 결렬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던 것이다. 격분한 우의는 메시와 악수도 하지 않고 돌아서 대표단으로 돌아왔다.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던 중국 측 대표단 전원 앞에서 우의는 입을 열어 두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고 다른 단원들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우의는 당장 1분도 머물지 않고 귀국해 국무부에 보고하기로 했다.

 

비행기표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먼저 공항에 도착한 우이와 장웨지오는 이코노미석 맨 뒷줄 두 장이 환불될 때까지 기다렸다. 비행기 안에서 우의와 장웨지오는 거의 쉬지 않고 국무부에 상황을 보고를 할 보고서를 재빨리 작성했다.


많은 실패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협상에서 미국의 지적재산권 문제에 대한 입장과 예상을 새롭게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지적재산권 문제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던 것이다.
장웨지오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투쟁은 내가 참여한 12년 동안의 시간뿐만 아니라 지금도 실제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력과 전문성으로 세계에 융합
개혁개방 전 중국은 20개의 국제기구와 다자조약 30여 개에 참여하는데 그쳤다. ‘개혁개방 40주년 국제법사업 간담회’에서 양제츠는 “40년 동안 중국은 국제조약과 국제메커니즘에 폭넓게 참여하여 거의 모든 정부 간 국제기구에 참여하였으며 500여 건의 국제협약에 가입하고 법과 조약을 운용하여 광범위한 분야의 협력을 추진하였고 중국과 세계간의 협력과 발전을 추진하였다”고 말했다.


종합 국력과 국제적 영향이 날로 상승함에 따라 중국은 주요 국제기구와 국제협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이 되었다. 중국 국제법 전문가들도 다자 틀에 박힌 국제법 분야에 깊이 관여하여 무대 중앙에 점점 더 많이 서고 있다.

 

1994년, 사지우융은 국제사법재판소의 대법관으로 선출되었고 2003년 2월 국제사법재판소장에 선출되었다. 이는 1946년에 이 기구가 설립된 이후 첫 중국 국적 인사가 소장으로 선출된 사례이다. 그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아시아개발은행 부법총고문, 동아시아지역국 부국장 등을 지냈으며 2007년 11월부터 2016년 10월까지는 세계무역기구의 첫 중국계 대법관을 지냈다.


국제법의 권위 있는 기관에 부임된 초기만 해도 중국 판사에 대한 국제법계의 편견과 관망의 분위기가 있었다. 1998년 아시아개발은행에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치열한 스카우트와 면접을 거쳤으며 몇몇 경쟁 후보를 제치고 나왔지만 그의 선출 결과에 대한 미묘한 거부의 시선도 있었다.


아시아개발은행은 새로 부임한 법률 총고문으로 은행의 모든 사업 담당자에게 강의를 시켰고, 장웨지오는 자신과 수강생들에 대한 요구가 엄격했으며 수업 때마다 출석을 요구했고 일주일 뒤엔 시험을 치렀다. 당시에는 PPT가 없었다. 그는 매일 야근을 하며 여러 종류의 사례와 분석이 포함된 두꺼운 수업안을 준비하였다.


첫 수업이 끝난 뒤 배리 메츠거 당시 법률 총고문은 장웨지오의 사무실을 찾아가 “정말 좋았다. 이렇게 훌륭한 법률 수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장웨지오는 곧 아시아개발은행의 ‘스타’가 되었고 많은 관리들도 그의 친구가 되었다. 장웨융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좋은 융합 방식은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며 자신의 실력과 전문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무대에 나선 첫 번째 중국 법조인 대표인 스지우융은 개인 전공 수준에 대한 인정도 받았지만 그의 국제사법재판소 소장 선거에서의 득표 배후에는 국가의 실력도 자리 잡고 있어 중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과 위력이 뒷받침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유엔의 6대 기구 중 하나이자 유엔의 가장 중요한 사법기구로서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국제법의 해석과 적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원 판사는 총 15명으로 “품격이 높고 국가별로 최고 사법직의 임명자격을 갖거나 국제법의 법학자로 공인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소장은 재판관 전원선거에서 선출된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소장으로 선출되면 전공 소양과 인품 등에서 각국 법학 전문가들과 법관들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접수된 국가 간 법률문제 분쟁,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는 사안들은 국제관계에서의 골칫거리나 민감한 사안들로 배경과 유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국제사법재판소 판사가 사건을 처리하려면 많은 양의 자료를 읽고 수십, 심지어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의견서를 작성해야 한다. 사지우융은 그가 접촉한 사건마다 작성한 의견서 더미가 땅 위에 1미터 높이라고 말했다.


소장 취임 후 스지우융은 모든 안건에 대한 토론회와 개정행사를 주재했다. 판사들은 각국의 법률 엘리트로, 입장과 생각이 다를 때 다수의견을 형성해 하나의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소장이 자신의 법률지식과 지혜, 리더십과 기술을 충분히 활용해 설득을 유도해야 한다. 주류 의견이 형성되면 원장이 직접 2명의 재판관을 이끌고 판결문 초안을 작성해야 한다. 사지우융은 매일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20분씩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 식사를 한다. 이 같은 근무상태는 17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장웨지오의 집에서 <중국신문주간> 기자는 벽돌 몇 개 정도로 두꺼운 서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그가 현재 관여하고 있는 사건 전체의 50분의 1 수준이다. 서류철을 펼치니 안쪽에 깨알 같은 글씨가 있었는데 모두 영어, 프랑스어 두 가지 말로 돼 있었고 곳곳에는 장웨지오가 메모와 표기를 해 둔 색색의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장웨지오는 “어떤 일을 맡든 언제나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고위급 법관들 중에서도 보좌관들이 준비한 요약본을 보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절대 그렇게 한 적이 없다. 모두 한 줄, 한 구씩 스스로 철저히 연구했다. 스스로 어떤 결론을 내리든지 분명하게 해야 했고 다 파악하고 있어야만 했다”고 말했다.


세계무역기구 상소기구에서 8년 넘게 일하는 동안 장웨지오는 중국이 WTO의 한 새로운 구성원에서 중요한 구성원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17년간 다자체제 건설과 쟁의 해결에 적극 참여해 처음의 제3자 지위에서 나중에 피고, 원고가 되고 일부 사건에서 승소한 것은 “다자체제에 대한 책임 있고 적극적인 국제적 법치에 대한 지지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국제법 영역에서 중국의 선구자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많은 국제기구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고위층 임원을 맡고 있는 중국인이 매우 적은 것은 중국의 국제법 인재의 비축이 아직은 국가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데 있다고 털어놓았다.


장웨지오는 2011년부터 칭화(清华)대학 로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솔선수범하여 젊은이들을 육성하고 있다. 수준 높고 영향력이 큰 국제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중국 관련 주요 부처에서도 힘을 내고 있다.


장웨지오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자주 “지식과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판결 날이 될 때까지 사전을 찾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적어도 영어와 프랑스 2개 언어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밖에도 젊은 세대는 법률 전문가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실정을 파악하고 중국의 법률과 요구를 이해해야 하며 국제법의 언어와 논리, 사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글/리징(李静)]

[저작권자ⓒ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카카오톡 보내기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정지웅 기자 다른기사보기
  • 글자크기
  • +
  • -
  • 인쇄
  • 내용복사

헤드라인HEAD LINE

포토뉴스PHOTO NEWS

많이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