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부시 대통령, 그는 우리에게 그렇게 시끌시끌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정치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평생 위협적이거나 전쟁과 관련된 정책으로 대국 간의 관계를 처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김지영 bnu0827@gmail.com | 2018-12-05 0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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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1 20,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의 모습. 이날 아들 부시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진/ 시각중국

[본지 특별기고인/ 위하이양(于海洋) 지린대학교 행정대학원 부학장·교수] 미국 현지 시간으로 11월 30일 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이하 ‘아버지 부시’로 칭함) 전 미국 대통령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별세 소식을 공유하면서 암호용어로 ‘CAVU(Ceiling and Visible Unlimited)’를 사용했다.


그날 밤 10시쯤, 아버지 부시는 텍사스 주 휴스턴에 위치한 집에서 조용히 생명의 종착역을 향해 걸어갔다.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전 대통령을 보내면서 쓴 이 메시지는 아버지 부시의 일생에 대한 요약이기도 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개인의 일과 국가의 운명 그리고 세계의 풍운이 교차되는 일생이었으며 비록 칭찬도 있었고 비판도 있었지만 결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일생이었다.


통제력을 지닌 패권 옹호자


미국 대통령을 지냈고 또 아들을 미국 대통령으로 키워낸 경험이 있는 아버지 부시의 일생은 미국의 역사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치 가문의 가장 뛰어난 아이로 성장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8세에 미국 해군의 항공부대에 입대하여 태평양 전장으로 보내졌다. 43대 미국 대통령인 아들 조지 W 부시의 생애와 달리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절하게 사활을 걸고 싸운 전적이 있다.


아버지 부시는 비행기에서 두 차례 추락한 적이 있는데 한 번은 연료가 고갈되어서였고 다른 한 번은 지상포화에 의해 격추되었다. 두 번째로 비행기에서 추락했을 때 그는 9명의 탑승 인원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날까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속해있던 미 해군 어뢰함대(Torpedo Squadron), VT-51 전투기 중대는 3분의 1만이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부친의 영향으로 아버지 부시는 군에서 돌아온 후 텍사스에서 석유 사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였다. 1960년대 아버지 부시가 텍사스 주 해리스 카운티 공화당 의장에 당선되어 당권을 잡았을 초기에 그는 당시 뉴욕 주지사를 지냈다가 나중에 미국 부통령에 당선된 록펠러의 지지를 받았고 3년 뒤 첫 번째로 참여한 선거에서 단번에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어 중앙정보국장과 부통령에 이어 대통령까지 가는 그의 정치행로는 전체적으로 탄탄하였다. 그러나 가문이 누리고 있는 권세와 언변이 부족한 등의 이유로 당시 미국 사람들은 고 부시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또 인격적인 매력이 다분한 레이건, 클린턴과 같은 서민 정치인들과 함께 있을 때 그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민첩하지 못해 보였고 평범해 보이기도 했다.


20세기 동안 미국 대통령 중 3명만이 연임에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를 제외하고 다른 두 사름은 1929~1933년 대공황 위기 시대의 후버와 1970년 말부터 80년 초까지 베트남전으로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던 카터 대통령이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고 부시 대통령이 외부에 대해 언제나 태연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정치적 심리가 성숙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 1988 8 7, 당시 미국 부통령을 지냈던 아버지 부시가 자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 사진/ 시각중국

노병으로서 부시는 전쟁에 직면할 용기가 있었고 전쟁의 참혹함을 깊이 깨달았다. 그의 정치 생활을 살펴보면 실패하는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미국이 패권의 정점에 올랐을 때 나라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정치인으로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집권 스타일은 그 시대 미국 특유의 웅장한 기개를 지니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두 가지는 그 정치 유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역대 대통령과 부통령 중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처럼 중앙정보국(CIA)을 이끌어온 경험 가진 사람은 유일하며 이는 공화당 정치구도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설정한 부분이다. 이는 공화당이 그를 안보와 정보 분야의 거물급 인사로 여겨왔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고 부시 대통령은 소련의 정보기관인 카게베와 직접 대결하는 것 외에 부통령 재임 기간 중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과 군비혁신에 깊이 관여했다.


대통령 취임 후, 부시는 두 차례 전쟁에서 이겨 미주와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강력하게 강화하였다. 1989년 12월 반미적 성향이 강한 노리에가가 파나마 정부수반에 취임하면서 미국과의 ‘전쟁상태’에 진입하였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1만여 명의 병력으로 파나마를 전격 공격하였으며 노리에가를 미국으로 데리고 와 가두고 재판을 받게 했다. 국제법에 도전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굳은 결심과 깔끔한 승리는 나중에 소말리아 수서양단에 군대를 보낸 클린턴과 대조적이다.


1991년 걸프전 발발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 생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진 이후 그는 테러 정서를 타파하고 지역 강국과의 전면전을 뚫고 승리한 첫 번째 대통령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밥 우드워드가 쓴 ‘새도우(SHADOW, 그림자)’란 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고 부시 대통령은 협상을 통해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자진 철군시킬 생각은 없었고 사담 후세인이 실제 미국이 진짜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할 수 있게 유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사막의 방패 작전(Desert Shield)’에서 ‘사막의 폭풍 작전(Desert Storm)’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부시는 능숙한 외교로 당시 양대 진영과 제3세계 국가들에 모두 미국이 어쩔 수 없이 정의로운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이처럼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은 적이 없었으며 그 후의 전쟁에서도 이런 지지를 획득한 적이 없었다.


승리의 지휘봉을 아들 부시나 트럼프에게 줬다면 사람들은 미국의 패권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번의 전쟁에 참전해 이긴 경험이 있는 고 부시 대통령은 바그다드를 점령할 수 있었고 국민의 80% 이상이 걸프전을 계속하길 바라는 상황에서 전쟁을 중단하고 유엔 결의를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국제적인 합법성을 얻었다. 이는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공격한 죄목이 됐지만 이는 아버지 부시가 존경 받는 정치인으로서 역사적 지위를 구축한 사건이었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평화주의자도 아니고 모태 온건파도 아니다. 그의 가족 역사와 업무 이력은 그가 미국 군수 그룹과 깊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정치 인생을 살펴보면 줄곧 충돌 규모에 대해 엄격히 제한해 왔다. 이는 정치에 대한 그의 올바른 이해뿐만 아니라 그의 기질과도 관련이 있다. 조지 H.W. 부시는 대처 당시 영국 총리와 콜 독일 총리와 긴밀히 협력하여 소련과 동유럽 진영을 와해시키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으며 결국에는 미국을 대표해서 양극 구도의 붕괴와 미국의 ‘일초(一超)’ 국면을 이끌어낸 장본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1990년대의 격변기에 가능한 한 연착륙을 이룬 국제구도는 아버지 부시의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1987년 그가 처음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할 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조지 H.W. 부시 부통령에게 공항까지 배웅해 줄 것을 지시했다고 훗날 회상했다. 승용차 안에서도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당내 초선 승리를 위해 ‘고르바초프가 간과해야 할 말’들을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취임하면 소련에 유화정책을 펼치겠다고 약속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모처럼의 솔직함에 감동을 받았다. 나중에 부시 전 대통령은 선거 때 신랄한 발언을 펼쳤던 이전의 태도에서 벗어났고 소련에 대한 온화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베를린 장벽을 철거할 때, 부시와 콜은 소련인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몇 개월간 미리 조율하였다. 1992년 아버지 부시는 ‘소련을 매장시킬 것이라’는 기존의 정책을 변환하여 옐친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방문을 계기로 미국 국민들은 먼 곳의 폭정을 현지 전제주의 정치로 바꾸려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민족주의 원한을 품은 자살 민족주의자들을 돕지 않을 것이라 분명히 밝혔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땅에서의 전란과 학살을 돌이켜보면 그는 당시 정치 수완을 온화하거나 관대하게만 펼칠 수 없었다. 이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적 안목과 자제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중 우호 관계를 보호하다


부시가 중국인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가 일생 동안 중미 우호에 크게 기여한 것과 관련이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고 부시 대통령은 중미 관계 발전의 역사적인 순간에 카메라의 가운데에 있지는 않았다.


‘핑퐁외교로 표현되는 작은 공이 큰 공을 굴릴 수 있다’는 중-미 관계가 서서히 호전되기 시작했던 시기에 아버지 부시는 당내에서 경력도 부족했고 닉슨 대통령 측근에도 속하지 못했으며 미중 수교의 초석을 다지는데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1999년 11월 15일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기로 합의했을 때 그는 이미 ‘아칸소주 촌놈’이라 불리던 빌 클린턴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 뒤 중미 양국은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건설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고 양국 관계 개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미중 관계에서 발휘한 진정한 가치는 그가 미중 관계의 방향을 늘 낙관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비록 이런 태도가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있더라도 그는 늘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 © 1943년 해군 조종사 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버지 부시.

/ 시각중국  

중국에 대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태도는 처음에는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1970년 그는 상원의원 선거 패배 후 공화당의 넬슨 록펠러의 도움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유엔 주재 대사에 임명되었으며 1971년에 유엔대사에 재임되었다. 당시 유엔 내에서 양대 진영이 서로 보이콧을 하던 배경에서 그의 임명은 사실 쉽게 성과를 낼 수 있거나 유권자들의 주목을 끌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중국과 드라마틱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1971년 10월 제26차 유엔 총회는 찬성 76표, 반대 35표, 기권 17표로 제2758호 문건을 성공적으로 통과시켜 중국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하였다.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당시 중국의 외교부장을 지낸 챠오관화(乔冠华)의 웃음 사진 뒤에 중국과 아버지 부시 사이에 여러 차례의 심각한 부딪침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처음에 조지 H.W. 부시는 대만 당국의 대표권을 강력히 지키려고 하다가 일이 그 방향으로 풀리지 않자 적극적으로 소련동맹 및 비동맹운동과의 조율을 통해 중국이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발의한 ‘이중 대표권’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과 대만 당국이 동시에 유엔에서의 대표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작은 원한이라도 꼭 갚아야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되었던 냉전시대의 정치적 분위기에서 아버지 부시가 훗날 새 중국의 유엔 복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중국 발전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972~1973년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공직생활을 하면서 옳은 선택을 많이 했다. 1974년 베이징 주재 미국 연락처 대표직을 수락한 것은 그가 미국과 중국의 관계 발전에 충분한 업적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1년 동안의 베이징 생활에서 그는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베이징 덕과 평생 인연을 맺었고 중국의 지도층과 사적으로 밀접한 친분을 유지했다. 그 뒤로 CIA 국장, 부통령과 대통령을 지내면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 공화당 내에서 중국통의 지위를 굳힘으로써 미중 관계가 강화되고 상당히 긍정적인 시기에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조지 H.W. 부시의 중국 발전을 지지하는 태도는 소련과 동유럽 격변기에 심각한 시련을 겪었다. 공화당 내의 강력한 보수세력들은 물론 심지어 그가 직접 발탁한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 등도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의 특수한 배경 아래 중국에서 소련식 붕괴가 일어나기를 바랐다.


당시 고 부시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유혹을 받았는데 만약 그가 중국에 대한 강경책을 강화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데 앞장섰다면 미국 역사상 워싱턴과 루스벨트와 견줄 만한 국제적 지위를 갖게 될 가능성이 컸다. 1989년 이후 그는 보수파의 시각을 잠시 수용하였으며 이때 미중 관계는 일순간 먹장구름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는 중국 정국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개혁개방에 대한 중국의 의지와 미국이 여전히 중국에 큰 우위를 보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모험심이 강하고 보수파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대결에 앞서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고 부시 대통령은 1990년 5월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1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시에 심각한 정치 위기를 조성했다. 미국 하원은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거부했고 미국이 중국에 준 최혜국 대우가 ‘미국이 제시한 인권 목표 달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성명을 채택했다. 만약 당시 상원에서 두 당이 예산 법안 논란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미처 하원의 결의안 심의를 하지 못했던 이유가 아니었더라면 중미 관계는 더 대결구도로 흘러갔을 것이다. 또 중미 관계의 저조 속에서 공화당 내 보수층에 대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견제가 없었더라면 클린턴 행정부가 나중에 대중 무역의 최혜국 대우를 이어가는데 직면하게 될 어려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이다.


아버지 부시의 대중국 정책의 본질은 우선 미국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다. 신 중국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단순히 친중 또는 우중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일관된 국제정치적 사고의 연속에 속한다. 고 부시 대통령은 세계화와 공동의 경제 사회생활이 미중 관계의 대립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믿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과 장구한 냉전의 경험을 통해 고 부시 대통령은 미국을 감당할 수 없는 충돌로 몰아넣지 않을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위협적이거나 전쟁과 관련된 정책으로 대국 간의 관계를 처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특히 냉전 후기에 이는 더욱이 동서양 정치가들의 일치된 선택이었다. 고 부시 대통령은 최강국의 정상으로서 세계의 평화발전을 위해 자기의 책임을 다하였다.


정치의 엄숙성을 견지하다


고 부시 대통령은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 시대 특유의 지혜가 있었고 시대적 한계도 지니고 있었다. 오랜 정치 생활에서 그는 엘리트 가문 출신의 암실 외교를 좋아했고 평생 족벌 정치의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점도 드러냈다.


1970년대 유럽과 아메리카를 뒤흔든 국제상업신용은행(BCCI) 사건이 터졌을 때 빈 라덴 가족과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붙잡히기도 했으며 결국 수많은 막후 세력의 보호를 받고서야 겨우 제재에서 탈출하였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언변이 특출한 것도 아니었고 반응도 둔한 편이라 선거정치에서 이렇다 할 만한 승리를 거둔 적이 없었다. 그는 정치인생에서 록펠러, 레이건 등의 신임을 얻어 도움을 받게 되었다. 부통령을 맡게 된 것도 워터게이트 위기로 선거도 치르지 않고 그는 미국 넘버 투 자리에 올랐고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에도 레이건의 굳건한 지지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버지 부시는 재선에 실패했고 패기가 넘쳤던 젊은 클린턴에게 패하게 되었다.

 

▲ © 2018 12 3.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생전 아버지

시 대통령의 도우미견 설리가 주인의 영구 앞을 지키고 있다.

사진/ 시각중국  

그럼에도 그가 세계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부시가 평생 동안 한 번도 이성적인 판단을 잃지 않았고 개인의 이익만을 도모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 스타일에 묻어나는 특유의 평온함은 반대파에게 둔감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빌 클린턴처럼 젊은 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아들 부시 대통령이 글자를 읽던 모습을 재미있게 봐주었던 미국 남부지역 농민들의 인기를 받을 수도 없었으며 포퓰리즘 세력들에게 어필되는 열정적인 모습의 정치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엄숙성을 견지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공중전, 걸프전, 소련 붕괴라는 역사적 순간을 겪었다면 미국 언론과 백악관 안팎에서 얼마나 요란을 떨고, 과장된 홍보를 할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불명즉사(不鸣则死)의 시대에 정치가와 민중은 협박을 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이익을 얻거나 그 쾌감을 느끼는 데 익숙해졌다. 정치는 더 이상 공약수를 얻는 것을 영예로 여기지 않으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사회를 분열하는 것을 능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반 대중들은 진짜 혹은 거짓으로 남은 밥과 음식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솥을 부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한 위험을 의식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행 국제질서의 기반이 충분히 두터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정치인으로서 그도 연기할 때가 있었지만 세계 최대의 강대국을 이끄는 슈퍼 정치지도자로서 조지H.W. 부시 대통령은 정치 쇼의 한계와 대가에 대해 항상 경각심을 갖고 명석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했다. 80세 이후에도 생일만 되면 스카이다이빙을 했던 이 노인은 담력과 광기가 부족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잘 컨트롤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루하다는 지적을 받을 경우도 있었지만 자신의 체면과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꾸밈이 난무하는 오늘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이런 성격은 더욱 찾아보기 드물다.


워싱턴 포스트의 부고에서 말했듯이 “그가 다른 사람들과 연락했던 방식은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이었고 가상의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임기를 마친지 30년이라는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가치관과 도덕성은 지금의 각박한 정치로부터 한 세기나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버지 부시와 그 세대의 정치인들이 하나 둘씩 정치무대를 떠났을 때 과연 정치의 엄숙함이 어떻게 유치될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묻고 답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조지H.W. 부시 대통령을 종종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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