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가(表達者) 자오리신

김지영 bnu0827@gmail.com | 2018-07-31 13: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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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린치징(声临其境)’ 예능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배우 자오리신(趙立新)의 이름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0에 가까운 그는 막강한 대사 읽기 내공과 다국적 언어 구사 능력을 앞세워 수많은 팬들을 모으고 있다. 그는 이론과 사변에 능하고 연예 스캔들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며 직설적으로 관점을 나타내고 연극을 자신의 신앙으로 여긴다. 연예계에서도 그는 일반 배우들과 다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기자/ 저우티옌(周甜)] 그는 1968년생이다. 그의 부모들은 아들에게 그 시절 가장 흔한 이름인 ‘리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배우가 된 후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더 기억하기 쉬운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권유했지만 자오리신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자오리신에게 개명은 성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개명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기호를 지우는 것과도 같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6년부터 연기를 시작해 2009년부터 ‘전문 배우’가 되었다. 10여년간 그는 연극 무대, 브라운관, 스크린을 넘나들며 여러 가지 역할을 소화했고 잘 만들어진 외국 고전 연극을 중국 무대에 선보였으며 관객들과 마음의 교감을 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발산했다. 하지만 객석의 얼마 안 되는 관객들을 보면서 그는 무대 위에 있는 자신과 관객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로 돌아와 그는 처음 대부분의 시간은 조연을 맡았다. 그때부터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이름 석자가 브라운관에서 익숙한 듯하지만 낯선 연기자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연극 무대에서 오래도록 주목을 받지 못했던 배우 자오

리신이라는 원래의 자아와 ‘유명한 연기자’ 사이에 거리감이 조성되었고 그 차이가 점점 커져만 갔다. 

 

예능 프로그램 ‘성린치징’을 통해 시청자들은 자오리신에 대해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스타가 되어 유명해졌다. 그의 막강한 더빙 실력과 다양한 언어 구사 능력, 와이셔츠와 조끼, 정장 세트 등 의상도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으게 되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조만간 감독이 될 계획도 갖고 있다. 자오리신은 중앙희극학원과 중국언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외적인 수식어 아래 그는 자신을 어디까지나 ‘표현가’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저의 표현방식이 받아들여지면 기뻐할 일이고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저는 표현을 한 겁니다”라고 전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자오리신은 종래로 닉네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닉네임 뒤에 숨어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죠. 제가 던진 메시지이니깐요”라고 전했다. 그는 SNS에 자신의 사생활을 공유하지 않고 ‘펑여우쵄(朋友圈), 중국 위챗(한국의 ‘카카오스토리’와 가장 유사함)에 글과 사진을 올리는 곳에도 내용을 적게 올리고 있다. 그는 남들이 오늘 어디에 갔고 뭘 먹었는지 등 SNS에 디테일하게 올린 일상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클릭한 것을 보면 이해를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너무 사소하고 사적인 내용인데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타인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들이죠.” 이런 것들은 그에게 일상을 공유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극단적인 사회 현상을 보았을 때에만 그는 무언가를 발표하고 싶은 욕망이 발동한다고 했다. 

 

연예인으로서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든 자오리신은 어딘가 모르게 독특하다. 그는 어떠한 변화를 일부러 찾아 나서지 않았지만 끝내 대중들에 의해 나이 49세에 새롭게 발견되었다.  

 

생각의 전환 

 

<중국신문주간> 기자의 맞은 편에 앉은 자오리신은 ‘성린치징’ 무대에 오를 때 입었던 와이셔츠와 조끼, 정장 세트가 아닌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는 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레이스업 부츠를 신고 있었으며 정갈하게 면도를 했다. 그는 여러 스타일의 모자를 가지고 있었다. 자오리신은 스타일의 전체적인 조화에 신경을 쓰며 의상의 매칭을 중요시 한다. 그는 대체로 오프라인 매장에서 혼자 옷을 고르는 편이다. 자신을 가꾸고 싶어 하는 것은 그에게 첫째로는 자신을 편안하게 가꾸고 둘째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 3월의 어느 한 토요일은 그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시간이었다. 그는 저장(浙江) 헝뎬(橫店)의 한 호텔방에서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날 오후 좋은 햇살을 맞으며 그는 호텔방을 나와 밖에 위치한 인공 호수 옆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을 찾아 앉았다. 자오리신은 몸을 움직여 흐르는 물 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너무 좋았어요. 아마 이게 멍 때리는 게 아닐까 싶네요.” 

 

지난 한 해 자오리신은 거의 개인시간 없이 지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마어마한 업무량을 소화해냈다. 그는 연극,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일들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일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죠” 자오리신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일에 종사하는 다른 동료들을 보면 “왜 이렇게 바쁘게 보내는가” 하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의 질문에 동료들은 “갚아야 할 인정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 자네는 잘 모를 거야”라고 대답을 했었다. 지금 그는 그 말에 공감한다. 자오리신은 “가끔 인정을 갚느라고 피곤할 때도 있어요. 에너지가 마음 같이 따라주지 않으니깐요”라고 했다.  

 

예능 프로그램 ‘성린치징’은 그의 바쁨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제1회 방송 때 처음에 자오리신이 등장하자 시청률이 하강되었으나 그가 토크를 시작하자 다시 시청률이 오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제작진들이 이 사실을 그에게 이야기하자 자오리신은 시청률 그래프 뒤에 있는 시청자들의 표정이 상상이 갈 정도였다가 했다. 자오리신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마치 처음에 “이 사람 누구인지, 연예인이 맞나” 하는 반응으로부터 “아, 그 사람 괜찮은 것 같네”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제2회부터 출연하였는데 현장반응이 좋자 제작진들이 2회 방송분을 앞당겨 제1회에 내보냈던 것이다. 첫 회가 1월 6일에 방송되었다. 방송 당일도 그에게는 평범한 토요일 밤에 불과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현장에서 촬영하고 있었다. 이 예능은 목소리와 대사를 통해 주인공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다. 당초 제작진들이 그를 찾아와 프로그램의 컨셉트를 소개할 때 자오리신은 편안하게 다가왔고 그래서 방송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방송 이후 시청자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지 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방송 다음날 자오리신의 이름과 그의 더빙 동영상이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갑자기 많은 전화가 걸려왔고 예능 섭외 및 연기 제의가 많아졌다. 프로그램 출연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이와 동시에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자오리신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예능에 대해 그는 자신이 원래는 비교적 배척하는 편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스타를 불러 오고 여러 가지 사적인 질문을 하고 시청자들을 웃겨주고 남의 결점을 웃음의 소재로 사용하며 애교를 부리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예능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태도였다. “이런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무슨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까?” 시청자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했을 때 얻은 답은 한바탕 하하 웃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의 고정관념을 바꾼 것이 ‘지옌즈루미옌(見字如面)’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 시즌1에 자오리신은 고정 패널로 참석했다.

 

‘지옌즈루미옌’ 시즌2에서 자오리신은 12통의 편지를 읽었는데 그 시즌에서 가장 많이 편지를 읽은 패널이었다. 그는 위다푸(郁達夫)가 왕잉샤(王英霞)에게 쓴 러브레터를 읽었고 린줴민(林覺民)이 평생을 사랑한 천이잉(陳意映)에게 쓴 절필신 ‘여처서(與妻書)’도 읽었으며 우산구이(吳三桂)가 부친에게 쓴 결별신도 독송했다. “‘지옌즈루미옌’은 엄숙하고 학술적이며 역사에 대한 재조명입니다. 관객들과의 소통이 많지 않고 웃기는 내용이 별로 없으며 일부러 화제가 될만한 내용을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자오리신이 보기엔 이는 인문계 유형의 프로그램에 속했다. “마치 순환과도 같아요. 사람들은 예능 개그의 길에서 너무 오래 걸어 다녔고 지루해하고 허탈해 합니다. 물질이 풍부해져 외부 세계에 복잡하고 화려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럴수록 내면이 공허하고 빈약합니다. 사람들은 ‘왜 무기력할까?’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집단 의식의 탄생입니다. 인문학 유형의 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올 때 시청자들은 이런 문자들도 사실 복잡한 것만이 아니라고 느끼게 됩니다. 작은 메시지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조용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거나 악의적이고 저속한 내용으로 시청자들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움직여 줍니다.” 그는 <중국신문주간>에 이렇게 말했다. 

 

계몽 

 

몇 년 전 자오리신은 블로그에 글을 썼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점차 많아졌고 시간과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어 시간을 내 글을 쓰기 힘든 상황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글쓰기는 함부로 대충대충 할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쓴 내용이기 때문에 시간을 내 읽어주는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는 독서하는 습관을 줄곧 유지하고 있다. 자오리신은 항상 몇 권의 책을 동시에 본다. 그는 헝뎬에서 촬영하고 있는 현재의 호텔방에 테니(鐵凝)의 신작 ‘비행양주사(飛行釀酒師)’와 ‘일본문화사(日本文化史)’ 등 10여 권의 책을 두고 있다. 자오리신은 종이 책을 보는 것에 익숙하고 전자 책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는 스토리 유형의 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서 같은 책들을 읽으면 어딘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고 감정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이성적이고 냉정한 편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독서 습관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오리신의 부친은 예전에 우한(武漢) 지역에서 군생활을 했고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뒤 신화서점에 배치돼 일하게 되었다. 자오리신은 세 명의 형제가 있는데 그는 막내이다. 그의 한 형은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당시 자오리신이 보기에 이상하다 싶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한 책들이나 철학가 루소의 책들을 읽었다.

 

자오리신도 할 일이 없을 때 집에 있는 이런 책들을 읽었고 재미없으면 책을 내려놓았고 재미있으면 계속 읽어 내려갔다. 이것이 독서에 대한 그의 첫 기억이었다.  

 

부친과 형을 제외하고 그의 한 소꿉친구가 자오리신의 문학적인 흥미를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자오리신보다 몇 살 많았던 소꿉친구는 외국 문학을 좋아했고, 츠바이크와 모옴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본인이 읽은 이야기를 초등학교에 다니던 자오리신에게 들려주었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친구의 모습은 독서에 대한 자오리신의 감흥을 자극했다. 그렇게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와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을 읽었고, 나치가 사람들의 심령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하는 내용의 ‘체스이야기’도 읽었다. “그때는 어리벙벙한 채 읽었는데 나중에 커서 다시 읽었더니 금방 내용이 전달되더라구요.” 그가 나중에 외국 연극을 사랑하게 된 이유도 어렸을 때 외국 문학을 읽은 경험 때문이었다. 

 

1986년 18세의 자오리신은 중앙희극학원 연극문학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2학년 때 연출학부로 편입한 뒤에 구 소련으로 건너가 연출전공 공부를 했다. 졸업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전문 연극배우가 되었는데 그는 스웨덴 국립대극원에 입학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그는 2000년에 귀국해 중앙희극학원 초빙 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자오리신은 스웨덴과 중국 양쪽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스웨덴에서의 삶과 일을 한 순간에 뿌리칠 수 없어 6년이라는 정리시간을 가졌다. 그는 2006년에 스웨덴을 떠났고 중앙희극학원도 떠나 연기자로서 활약했다. 그는 배우뿐 아니라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는데 2009년 드라마 ‘혈색침향(血色沉香)’을 시작으로 모든 일을 제쳐두고 전문 배우가 되었다. 

 

실제 지난 몇 해 동안 자오리신은 영화에 많이 출연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1년에 한 편도 출연하지 못했으며 가장 많아 봐야 2편 정도의 영화를 찍었다. 그는 2015년 ‘우무성처(於無聲處)’에 출연하였는데 이 작품으로 제22회 상하이 TV페스티벌 ‘바이위란(白玉蘭)’ 어워즈 남우 조연상을 받았다. 그는 그 해에 여섯 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게 되었고 그때부터 작업 리듬이 빨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저는 배우입니다. 어떤 연기를 할지, 왜 그 연기를 해야 하는지, 연기하는 극중 인물을 통해 시청자들이 무엇을 얻을지, 무엇을 전달할지, 어떤 영향을 줘야 할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오리신이 보기에 이런 것들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들이다. 

 

가끔 그도 분노한다. 

 

그는 핸드폰에서 ‘청소부의 삼륜차가 호화 롤스로이스 자동차와 충돌’, ‘연예인 호화 저택 공개’ 등 뉴스들이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을 보며 “이런 쓸데없는 기사”라고 했다. <중국신문주간> 기자 앞에서 그는 이런 유형의 뉴스 제목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일반인들이 어떻게 존엄을 확립할지, 어떻게 젊은 세대들이 인생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는 어느새 목소리와 말의 속도를 높였고 어딘가 격앙된 모습이었다. 

 

그는 왜 ‘디야오스(屌丝, 돈도 없고 외모도 별로고 집안배경도 없는 미래가 어두운 사람을 일컫는 말)’와 같은 단어들이 유행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단어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표현”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고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참모습이라고 했다. 자오리신 자신은 이런 ‘천박해 보이는’ 신조어를 절대 쓰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성 

 

몇 년 동안 자오리신은 줄곧 연평균 1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스웨덴에서 일할 때 그는 많은 연극들을 관람했으며 그 연극들은 그로 하여금 깊이 사고하게 하고 삶에 얽힌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풀어 주었다. 

 

2005년에 그는 ‘자오리신 연극 공작실’을 설립했다. 그는 스웨덴에서 봤던 훌륭한 연극작품을 중국 관객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2016년에 올린 연극 ‘대선생(大先生)’에서 자오리신은 루쉰(魯迅) 역을 맡았다. 2017년 그는 스웨덴의 저명한 극작가인 스트린드베리의 희곡 ‘아버지(父親)’를 선보여 감독 및 주연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했다. 실제로 2005년 자오리신은 베이징 런이(人藝)소극장에서 연극 ‘부친’을 공연했는데 이때에도 감독 및 주연을 맡아서 열연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은 엄숙한 유형의 해외 연극을 중국 국내 연극 무대에 올렸을 때 처음에는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를 보지 못했다. 자오리신의 인상 속에 가장 썰렁한 때는 한 소극장에 관객이 단 3줄밖에 앉지 않았던 기억이다. 늘 무대 위에서 열연했지만 관중들의 표정은 어색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당시 그가 겪었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았고 나중에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는 스스로 우월한 프로의식에 빠져 있었어요. 이렇게 좋은 공연을 감상할 줄 모르면 그건 관객들의 손실이라고 생각했고, 너무 공연이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생하는데 비해 피드백이 적다고 원망도 했었죠.” 자오리신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변화는 최근 5년 사이에 발생했다. 

 

2017년에 그는 연극 ‘아버지’를 다시 무대에 올렸고 14회 공연을 소화했는데 매 공연마다 표를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 공연 횟수가 많지 않았지만 관중들이 뽑은 2017년 최고의 인기 연극공연에 선정되었다. 이번엔 자오리신은 자신의 표현이 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성취감을 느꼈다. 그는 과거 공연을 관중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에 대해 자신의 표현방식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자오리신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작품의 거창한 착상과 철학적인 사상 및 그 표현에 집착하여 표현방식에 소홀히 했다고 털어 놓았다. “좋은 작품은 자연스레 재미가 더하죠. 사색하고 음미하는 시간을 견뎌 얻을 수 있는 재미이죠. 관객들은 아이들과도 같아 연기자가 한줄기의 빛을 주면 바로 감각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자오리신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저희들은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분명히 답이 없는데 거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적어도 사람들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연극은 그의 신앙이라고 고백했다. 교사를 하지 않아도 되고 MC를 안 해도 되고 드라마도 찍다가 그만둬도 되지만 연극 무대만은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좋은 연극은 때로 치유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현재 그는 1년에 한편의 연극을 선보인다. 이는 마치 그 자신을 정화하는 것과도 같다. “먼지와 불순물이 너무 많아 저의 마음과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습니다.” 자오리신은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좋은 연극은 언제나 우리 개개인보다 높은 차원에 위치합니다. 거인(巨人)들을 선망하면 늘 깨어있을 수 있어 자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자오리신은 49세에 갑작스럽게 인기를 얻었다. 

 

“반백이 되어가네요.” <중국신문주간> 기자가 그에게 나이를 언급하자 그는 쉰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는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신조어인 ‘중넨여우니난(中年油腻男, 자기 몸 관리하지 않는 중년남성이라는 의미)이라는 말이 자신과는 연관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은 아직도 못마땅하게 보이는 일들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그는 젊었을 때 자신이 고집이 강했고 앞길이 막힌 줄 뻔히 알면서도 늘 앞으로 나가다가 온 몸에 상처를 입는 편이었다고 고백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기 싸움을 벌이는 일은 없다.그에게는 서로 충동되는 특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마음은 약하나 의지가 강한 것 등이다. 마음으로 생활을 느낄 수 있는데 섬세한 감정, 슬픔 감정, 차가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느낌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빠져 자신의 정서를 스스로 컨트롤 하기 힘든 감정들이다. 하지만 강한 의지는 그로 하여금 이런 약한 상태에서 빠져 나오도록 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으며 심지어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사람의 생각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어떤 도덕적인 제약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반성하고 나름의 규율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지속해 온 생각들이다. 서로 끌고 당기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 어떤 때 그는 그것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작권자ⓒ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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