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유희성과 비판성이 공존하는 시대의 기록자

조비는 선배 예술가들의 작품 속 정치적 기호도 이해하고 바링허우(80后) 아티스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사적인 시각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마침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비판성을 띠면서도 유희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조비는 이 급속한 변동 시대가 낳은 산물이다
발행인겸편집인: 강철용 newschina21@naver.com | 2021-07-16 13: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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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발행인겸편집인: 강철용]

커다란 전시장은 신비하고 복잡 다단한 도시의 모습이다. 스크린이 뿜어내는 광경으로 뒤덮인 ‘하성(下城)’은 옛 극장, 분수, 택배기사의 삼륜차와 은은한 향기가 나는 포장마차가 더해져 과거와 현실의 시공을 초월한 밤의 정원을 구성한다. ‘상성(上城)’은 미래를 연결하고 금속 트랩 사이에서 마치 우주 비행선의 독립 부스를 뜯어 랜덤박스를 해체한 것과 같다.

 

 

▲ <누구의 유토피아인가>, 2006년. 사진/예술가, 비타민아트 공간 및 SprÜth Magers

2021년 봄, ‘조비: 시대의 무대’ 전시가 열렸다. 현대 미술 작가 조비의 이번 전시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로 가장 전면적인 회고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베이징 UCCA울렌스 현대아트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가 중국 본토에서 연 첫 번째 기관 개인전이다. 

 

 

서방 언론에 의해 “중국 현대 미술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평가를 받았던 조비는 국외의 중요한 예술기구와 전시회의 단골 참석자가 되었으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석하였고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최초의 중국 예술가이다. 지금 그의 작품이 체계적으로 중국 국내 관객들에게 조명되고 있다.


21세 때 그는 즐기는 마음으로 첫 영상물을 만든 뒤 뜻밖의 해외 출품 기회를 얻었다. 그는 20년간의 예술 창작 생활 동안 영상, 연극, 가상현실 기술과 장치 등 멀티미디어 매체를 활용해 중국 사회의 변화상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뉴욕타임스(NYT)는 “조비는 중국의 급속한 성장과 고도로 산업화된 경제발전이 일상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초현실적으로 부각시켰다”고 평가했다.

 

 

▲ 조비(曹斐). 사진/Stefen Chow

“저것은 바다를 보고 자란 눈이다”
1,800m²를 누비고 다니며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끝까지 캐어보게 하는 작품 ‘도시’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중에는 조비라는 명성을 듣고 달려온 문학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예술 수집가들도 있었고, DSLR카메라를 들고 온 노년 사진 애호가, 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모, 심지어 샤오훙슈(小红书, SNS 성격을 가진 중국의 쇼핑몰)에서 인기몰이 중인 왕훙(중국의 SNS스타로 많은 팔로우를 거느린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조비는 마치 작품 속에서 그가 바라보는 프롤레타리아들처럼 예술 종사자 이외의 일반 관객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으며 관람객들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화이트박스 같은 시크한 국제 전시 스타일과는 달리 연례적인 예술가 작품들을 선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전시 공간을 완전 개방해 예정된 코스 없이 풍경과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도록 했다. 빛의 그림자를 따라 걸으면서 90년대풍 포장마차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예술 순례의 짐을 훌훌 털어버린 순간 관람객들도 조비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간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한 채 전시의 일부가 돼 있었다. 

 

작품과의 거리가 느껴지지 않게 하려는 조비의 바람대로 관람객들은 엄숙한 전시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며 누구든 걸어 들어와 편하게 어떤 작품 앞에서 머물며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항상 가장 평범한 개체에 눈을 돌리고 관심을 가지려는 조비의 생각은 그의 어린 시절 경험과 관련이 있다. 1978년 광저우(廣州)에서 태어난 조비의 부친은 유명한 조각가 차오충언(曹崇恩)으로 광저우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어머니도 미대 교수였다. 

 

▲ 사진: <아시아 1호> , 2018년.

 

예술에 대한 억압이 막 풀리던 시절, 예술가들은 광범위하게 시골로 내려가 작품을 수집했고, 조비의 부모는 창작과 교습에 열정을 쏟았으며 조비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마인드로 양육을 했다.


세상에 대한 기억이 있을 때부터 조비는 부모를 따라 각지에 조형물을 설치하러 다녔으며 광둥에서 베이징까지 갔다. 이들은 각 지역마다 일반 가정집에 머물면서 사투리를 배웠다. 조비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시골에 내려가 교편을 잡은 뒤 어린 조비와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을 방문했던 기억이다. 

 

조비는 “저 사람들의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은 바다를 보고 자란 눈이다”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소묘를 그렸고, 미술대학으로 돌아간 뒤에도 마을 주민들과 왕래를 하였다. 조비가 자라서 미술대학 학생이 된 후 그녀도 그 작은 어촌 마을에 가서 실물이나 실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곤 했다. 

 

엄마의 그림 속에 그려져 있던 젊은 여인들은 이미 할머니가 되었다. 조비는 “그들과 세대를 뛰어넘는 감정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몇 년 전에 마을 주민들이 광저우로 진료를 왔을 때 조비의 모친은 이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농촌에 내려가 풍경채집을 하며 서민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드는 것이 중국의 여러 미술대학에서 전통으로 이어져 왔지만 도시화 속도가 높아지는 오늘날 농촌의 모습, 사람 간의 정은 예전과는 다른 것 같다. 조비 역시 “이런 변화가 예술 창작에도, 사람끼리 만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고 개탄했다.


전시 입구의 ‘예술가의 방’에는 조비의 성장 경로와 예술적 근원지를 잘 보여준 수많은 ‘물증’이 전시되어 있었다. 부모들은 그가 보통 사람들의 눈을 잘 바라보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 가정의 농후한 분위기도 조비가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유명해질 수 있는데 역할을 했다.


세상에 대한 또렷한 기억이 없던 나이부터 그는 부모들의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으며 쑨중산(孫中山),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등 유명인들을 조각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조금 더 컸을 때 어머니는 장난감으로 스케치북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흰 종이에 낙서를 하면서 자랐다. 그녀의 두 언니는 소묘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조비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엮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기차역), 2014년.

이런 가정환경에서 예술의 길을 걷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지만, 조비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 세대가 쓰는 매개체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90년대 대만과 홍콩의 대중문화가 전국을 휩쓸면서 광저우는 개방의 요충지로서 세계 최고의 트렌드를 일시에 흡수했다.

 

 

대부분의 내륙 아이들이 아직 청춘, 패션잡지에 대해 모르고 있을 때 열서너 살의 조비는 이미 ‘사오난사오뉘(少男少女)’, ‘예스 아이돌(Yes Idol)’, ‘제메이(姐妹)’ 등 잡지의 애독자였다. 그가 숙제장에 스타 테마의 시리즈 그림을 그려 그림과 글을 한 작품에 담은 것이 오늘날 그의 작품의 콘티가 되기도 했다. 

 

궈푸청(郭富城)의 멋과 춤사위에 매료돼 뮤직비디오를 틀어놓고 동작을 연구하던 조비는 학원 수강료를 아예 비보이 선생님에게 맡겼고,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벽돌 모양의 녹음기를 따로 놓고 밤마다 가로등 아래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한 춤사위를 배웠고 배운 스텝을 학교 친구들에게 가르쳐 무대를 꾸몄다.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화면은 고스란히 그녀의 카메라에 기록되었고 필름 사진기와 디지털 카메라에서 시작해 단계적으로 90년대 초에 신흥 가전 제품 분야에 편입된 디지털 영상(DV)까지 업그레이드되었다. 조비는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독특한 창작의 길을 걸었다. 부모세대가 다루었던 육중한 사실적 전통 조각 창작방식과 달리 그녀는 매개체 운용과 사뭇 다른 뮤지컬 비보이 영상, 사진 등 시장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한 신형의 예술 형식을 접목시켰다. 이는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흡수한 시각정보이며 시대의 미학적 변혁이기도 하다.

 

 

▲ 사진: <아시아 1호> , 2018년.

현대 예술영역에 즐겁게 뛰어들다
1999년 광저우 미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비는 방학 중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들을 모아 DV로 자체 창작 작품을 촬영하였다. 이는 그녀의 첫 번째 공식적인 창작물이었다. 영상물은 미대생들의 광기 어린 삶을 의식의 흐름으로 그린 단편 영화 ‘실조257(失調257)’이며,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작품은 광저우의 유명한 문예서점인 보르헤스의 설립자이자 광저우미대 교수인 천둥(陳侗)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는 광저우 태생의 프랑스 국제 프로모터인 허우한루(厚漢如)에게 작품을 추천했다. 조비는 허우한루가 파리에서 전화를 걸어와 스페인에서 열리는 컨템포러리 아트 국제전에 작품을 갖고 오라고 요청했던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미술계 ‘85사조(思潮)’의 영향으로 중국 현대예술이 왕성해졌고 지금 업계 ‘4대 금강’으로 불리는 왕광이(王廣義), 장샤오강(張曉剛), 팡리쥔(方力均), 위민쥔(嶽敏君)이 그 시기에 이름을 올렸다. 1950~60년대 태생인 이 예술가들은 정치적인 의미와 반항정신을 지니고 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4대 금강’ 등의 작품이 집단 출품돼 중국 현대예술 최초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밀레니엄을 전후한 현대 예술 영역에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은 조비의 작품은 이전 세대 예술가들과는 전혀 다른, 강한 개인의식과 놀이정신을 보여준다. 당시 천둥은 보르헤스 서점에서 광저우 현지 예술가와 평론가들을 모아 ‘스탸오257’을 위한 세미나를 열었는데, 이 작품이 세대 간 이동의 전형이고 역사 기호를 매우 현대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Nova_2019_video_Image

주강삼각주 일대 예술가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열자 조비 본인은 적잖게 놀랐다. 당시 21세였던 그는 큐레이터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상황이었고 당시 그의 학교 교재에는 현대예술에 대한 표제어조차 없었다. 이어 이듬해에 그의 작품인 ‘사슬’은 세계적인 예술 수집가인 울리 지그의 눈에 들었으며 조비는 상하이 비엔날레의 가장 논쟁적인 외곽전 ‘비협조 방식’에 최연소 예술가로 참여했다. 

 

 

해외 유학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던 조비에게 국내외의 여러 전시에서 러브콜이 점차 늘었고 그는 의도치 않게 현대 미술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 Nova_2019_video_Image

 

그의 창작도 장난치듯 즐기던 취미에서 자신의 밥그릇을 책임지는 주업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비의 작품 속 표현은 당시 중국의 발전과 직결돼 당대 중국을 관찰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례였다. 이것이 조비가 일찍부터 국제무대에 진출하게 된 요인이었다.” 궈시(郭希) UCCA 울렌스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전시부 총감독은 <중국신문주간>에 이렇게 말했다.


90년대 말에서 금세기 초까지 종이 매체가 가장 왕성하게 발전했던 시기에 언론은 민생과 사회 현실에 대해 큰 관심을 드러냈으며 조비는 자신이 자란 

광저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현재 젊은 세대의 막막한 조바심에서 사회와 인간성의 더 깊은 차원의 배려와 구현으로 시각을 전환하였으며 광저우의 도시 모습과 시정 생활이 그녀의 초기 작품의 창작 원천이 되었다.


2003년 60허우 예술가인 어우닝(歐寧)과 함께 실험 다큐멘터리 ‘산웬리(三元裏)’를 촬영하던 때 그들은 산웬리 시점에서 출발해 광저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도시 산책객의 자세로 역사의 빚, 현대화와 영남 종법 취락문화의 충돌과 조화를 모색하며 치열한 도시화 혁신 속에서의 변화를 기록했다. 60허우 예술가의 시대적 사명감과 사회학, 인류학 연구방법도 조비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조비는 주강삼각주 공장 문제에 주목했다. 그녀는 2005년 광둥(廣東)성 풔산(佛山)의 한 전구공장 일선 작업장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6개월간 인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촬영했다. 생산라인과 서로 다른 생산 부서를 넘나들며 경제전형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일종의 ‘공장 인류학’의 방식으로 조사연구를 진행했고 모든 사람들의 꿈을 모았다. 

 

작업복 차림의 아저씨는 작업장에서 브레이크댄스, 스페이스 스텝을 추었다. 동생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댄스 꿈을 접은 여성 노동자는 공작춤 치마를 입고 그가 일하는 곳간을 돌았으며 이 모습은 조비의 대표작인 ‘누구의 유토피아인가’에 나오는 명화면이 됐다.


그녀의 카메라에 담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점점 더 광범위해지는 세계화가 어떻게 중국 전역에서 펼쳐지고 있는지, 어떻게 사람들의 현실과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리 거대한 주제와 급변사태를 겪어도 결국 조비에 의해 일상과 풀뿌리 서민들의 머리 위에 자리잡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조비는 2006년 중국현대예술상(CCAA) 최연소 예술가상을 받았다.

 

 

▲ Nova_2019_video_Image

 

시간을 절개하다

‘누구의 유토피아인가’를 마친 후 조비는 주강삼각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 창작이 거의 끝났다고 느꼈다. 당시 베이징은 올림픽을 맞아 활력이 넘치는 곳이 되었고 예술권은 물론 미디어권, 음악권까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침 베이징에서도 프로젝트와 전시 요청이 들어와 그는 작업실을 광저우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중국관 큐레이터인 허우한루의 초청으로 조비는 차이나 트레이시(China Tracy) 작품의 가상 디지털 플랫폼 ‘제2의 인생’에

 

▲ Nova_2019_video_Image

서 창작한 신작 ‘아·경(我·鏡)’을 출품했다.

 

이후 이 가상디지털 플랫폼에 가상도시를 만들고 냐오차오(鳥巢), 둥팡밍주(東方明珠), 판다 등 중국 특화 요소를 농축해 갈등하면서도 서로 어우러지는 기이한 디지털 도시를 만들어 수년간 운영해 왔으며 이를 기반으로 여러가지 디지털 작품을 창작하였다.

 


14년 전 선봉에 섰던 이 작품은 오늘날 ‘가상 인생’을 연구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며 생활의 반 이상이 가상세계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도 보인다. 

 

 

조비는 <중국신문주간>에 “오늘날 우리가 현실에서 사는 것이 제2의 인생일지도 모른다”며 “하루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온라인으로 교류하고 쇼핑, 온라인 리딩을 하고 있는데 ··· 첫 번째 인생은 이미 온라인으로 옮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가상세계에 ‘인민성채’(人民城寨)를 구축한 이듬해에 조비는 아이 엄마가 되었으며 신분 전환으로 보는 시각이 넓어지자 말세의 그림을 담은 작품 ‘미세먼지’와 ‘라 타운(La Town)’을 내놓았다. 그의 눈에는 과거, 현재, 미래와의 타임라인 상호관계가 조금씩 뚫려 가고 있었으며 “현재를 현재로 여기지 않고 미래를 미래로 여기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최상의 시간관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일시에 한 가지 일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문제를 풀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작품으로 시간을 쪼개 역사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 속 시공간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2015년 그는 폐쇄된 훙시아(紅霞)영화원 및 그 주변 베이징 주셴차오(酒仙橋) 사회구역의 역사와 변천에 대한 심층조사를 벌였고 중국 초기 전자공업의 핵심지대로 역사와 현재 시공간을 따라 지금까지 가장 크고 복잡한 예술 프로젝트인 ‘훙시아’를 만들었다. 2019년 그는 ‘훙시아’를 들고 파리에 상륙해 중국 아티스트 최초로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공상과학(SF) 영화 ‘샛별(新星)’과 다큐멘터리 ‘훙시아’를 모티브로 한 시공간 복합체 같은 ‘훙시아’는 조비와 그의 팀이 민간에서 수집한 수많은 관련 문헌과 실물, 중국 컴퓨터 역사를 연구하는 책, 국영 베이징유선발전소(738공장)와 국영 베이징전자관공장(774공장)의 공장 역사 자료, 영화 표근, 옛 사진, 상영기, 1950년대 이후 중국 영화 및 지역 영화관 발전 역사 등 중국 영화와 지역사회의 영화발전 역사의 관련 소재들의 집합체이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상상하고, 현실과 역사, 공상과학으로 얽혀 이 커뮤니티의 전생과 금생 및 불확실한 미래, 개인, 나아가 집단의 시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신싱’의 결말에서 보여주듯 과학자인 아버지의 실험 실패로 영원히 컴퓨터 안에 갇혀 디지털 고혼이 된 아들은 가상의 미래에서 과거의 가족과 만난다.


조비는 ‘훙시아’의 ‘노을’이 사람들에게 밝게 보이면서도 역사를 떠도는 서글픔을 안겨준다고 생각하며 이 프로젝트의 ‘허’와 ‘실’이 모두 중요하고 여러 선이 얽혀야 하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상현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여주며 미래의 관객, 오늘의 관객들을 과거로 되돌아가게 하고, 그 시공간의 문을 통해 이 공간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허황된 공간을 창작하는 외에 현실에서 착실하게 창작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조비는 가장 평범한 행인에 주목하며 상업적인 영역도 마다하지 않고 BMW, 프라다 등과 협업을 즐겼으며 차이쉬쿤(蔡徐坤)과 같은 데이터 아이돌을 활용하기도 했고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다. 시대의 격변과 함께 성장한 그는 천성적으로 수용과 포용력을 겸비하는 데 길들여진 듯 기성 예술가들을 받아들였다. 외관상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기성 예술가들의 집단부호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당시 외국에 나가려고 했는데, 대표적인 중국 문화 요소를 사용해서 외부에서 더 쉽게 주목받았다.” 그는 80년대 현대 예술가들의 캐릭터적이고 유희적이며 거창한 서사에 무관심한 태도를 이해한다. 그는 마침 그 사이에 끼여 작품이 기성세대의 비판성을 완전히 잃지 않으면서 신세대 게임의 일면을 담고 있는 자신을 또렷이 봤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가치인 것 같다. ‘시대무대’ 개막식에서 조비의 재능을 처음 알아본 천둥은 “조비는 미대에서 길러진 것도 아니고, 현대 예술에서 길러진 것도 아니며 시대적 감각이 키워낸 예술가”라고 말했다.

기자/리징(李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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