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체험관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때는 이미 늦다.
환자는 병원에 맡기고 시신을 장례식장에 맡기지만, 아픈 마음은 누구에게 맡길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둔 마음의 답답함을 누가 풀어줄 수 있으며, 환자 자신은 또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욱 또렷한 의식으로 이 문제들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답을 얻게 될까?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6-11-17 1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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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저우펑팅(周凤婷)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죽음의 문이 열리자 엘리(Elly)는 두려웠다. 그녀는 자신이 ‘영원한 이별’을 이토록 두려워했음을 처음 알았다. 동반자 열 명이 뒤에서 눈으로 엘리를 배웅한다. 

 

엘리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문을 차마 들어서지 못한다. 동반자들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지켜볼 뿐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고 나서지 않는다. 누군가가 제안한다. “못 들어가겠으면 다시 돌아오세요.” 


엘리는 얼마 전 ‘죽음’을 선고 받았다. 죽음체험관에 마련된 과정에 따라 엘리는 어두운 길을 혼자 지나가야 한다. 길 끝에는 컨베이어벨트가 있어 그 위에 누우면 가상의 화장터로 들어간다. 소각로가 완전히 폐쇄되면 아치형 LED 조명으로 된 가상의 불꽃이 타오르고, 안의 온도도 올라간다. 5분 후 소각로 문이 열리면 엘리는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자궁 모양의 하얀 길까지 인도되고, 길을 걸어나와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이것은 ‘씽라이(醒来: 깨어남)’라는 죽음체험 프로그램이다. 체험은 두 시간 반 정도 진행되며 한 번에 12명까지 참여할 수 있다. 엘리가 두려워서 ‘다시 돌아오면’, 게임은 그것으로 끝난다. ‘생화(生花)’라는 게임 홀을 반대로 가로질러 바로 ‘인간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엘리는 ‘죽음의 신 앞에서는 속일 수가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개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게임에 완전히 몰입했다. 


죽음의 문이 닫히면 ‘살아있었을 때’의 동반자들은 로비에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주제로 토론과 탐구를 진행한다. ‘킬링(Killing)’게임과 비슷하게 게임이 끝나면 친구들이 또 한 명을 ‘죽음으로 몰아’ 죽음의 문으로 들여보낸다. 


살아있는 자를 위해 마련된 ‘죽음’


올해 4월 4일 청명절에 개관한 후 상하이(上海)에 위치한 ‘깨어남’은 큰 인기를 끌며 2,000명 이상이 찾아 죽음을 체험했다. 체험자들은 대부분 20~40세의 연령대이다. 


실제 죽음을 앞둔 느낌과는 많이 다르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이렇게 의식을 치르는 듯한 분위기의 공간에 누워 있으면 ‘죽음을 앞둔’ 순간에 아직 끝나지 않은 세상에 남은 바람과 미안한 사람들, 소중한 일들이 떠오르며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된다. 


‘깨어남’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생명교육’의 방식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 보도록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1969년생 황웨이핑(黄卫平)은 ‘깨어남’의 공동창시자 세 명 중 한 명이자 중국 최초로 호스피스사업을 시작한 공익사업가이다. 그는 2008년 5월 친구 왕잉(王莹)과 함께 상하이에 공익단체 ‘손에 손 생명사랑 발전센터(手牵手生命关爱发展中心)’를 설립해 기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말기 암환자들과 고령의 노인들에게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런 환자들은 보통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2016년 6월까지 그들은 2,000여 가정에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공했다.


너무 많은 삶과 죽음을 보다 보니 황웨이핑은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때는 이미 늦다. 그 때가 되면 환자와 가족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더 많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환자는 병원에 맡기고 시신을 장례식장에 맡기지만, 아픈 마음은 누구에게 맡길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둔 마음의 답답함을 누가 풀어줄 수 있으며, 환자 자신은 또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웨이핑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신문주간(中国新闻周刊)>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상하이 ‘공익신천지(公益新天地)’에 위치한 ‘씽라이’ 체험관 입구에 앉아 “취업 면접도 꽤 오래 준비하잖아요.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텐데 죽기 전에 미리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공익신천지’는 상하이 최초의 아동복지시설이 있던 곳으로 중화민국 시기의 건축양식이 남아있는 단지에 스물 다섯 개 공익단체가 입주해 있다. 


2012년 9월 황웨이핑과 ‘씽라이’의 또 다른 창시자 딩루이(丁锐)는 ‘생명교육’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자리잡을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생각한 것은 관에 누워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이 의식하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형식이나 실험 효과는 좋지 않았다. “체험자의 3분의1은 흥미롭게 셀카를 찍으며 가끔 눈물을 글썽거리고, 3분의1은 불길하다 느끼며 고개를 떨군 채 돌아가고, 나머지 3분의1은 냉담한 태도로 방관했다.” 


황웨이핑은 그 때 사람들이 전문분야를 포함해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장의사업이나 관련 의료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랬다. 그들은 서비스와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전념했지 심리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 황웨이핑과 딩루이는 장의사나 화장장을 자주 찾아 입관사와 친구가 되고 상하이 민정부(民政部)의 특별비준을 얻어 진짜 화장 소각로에 한번 누워보았다. 화장장의 소각로에 ‘소각된’ 최초의 산사람이 된 것이다.


딩루이는 용감하게 첫 번째로 누웠다. 그 때의 느낌을 ‘약간 떨리고 화장실 가고 싶은, 무대에 오르기 전 같은 긴장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술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송풍기가 작동하자 소각로에 온통 골분이 떠다니는” 그 순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질식할 것 같고 한동안 머릿속이 텅 비었다. 


갑자기 송풍기가 작동되기 시작했을 때 황웨이핑은 긴장되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질식할 것 같고 머리 속에 아무 생각도 안나요. 긴장되고 생각까지 할 수 없게 되죠.”


그 후 황웨이핑은 공포라는 것을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다. “공포는 생리적인 반응이 아니라 생각의 반응이에요. 생리적인 반응은 긴장과 두려움밖에 없죠..” 


몇 번을 실험해도 황웨이핑와 딩루이는 허이허(何一禾)가 합류하기 전까지는 체험게임의 설계 단계에 막혀 있었다. 


1996년생으로 갓 스무 살이 된 허이허는 2015년 5월에 체험관 사업에 합류했다. 황웨이핑와 딩루이가 ‘생명교육’ 아이디어를 낸 지 2년 반만이었다. 


허이허는 사회규범 안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다. 그의 어머니는 요가트레이너이자 인터넷 사이트‘영성 수련 세계(灵修界)’의 단골이다. 허이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억지로 영성 수련을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서 최면 명상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흰 빛 한줄기가 몸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해보라고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거에요.” 그는 중학교까지 마치고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한 후 복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론체계가 복잡한 철학, 심리학, 사회학의 책들을 혼자 독파했다. 


딩루이로부터 ‘죽음체험’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허이허는 ‘돈 많은 위기의 중년층이 비싼 돈 내고 하는’ 프로그램이라 생각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는 결국 황웨이핑과 딩루이의 생각에 설득되어 남았고 체험과정 설계자가 되었다. 


허이허가 설계한 게임의 주체는 체험자들이 폐쇄된 공간에서 가상의 임시적인 관계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보드게임이나 킬링게임이랑 비슷해요. 킬링게임에서는 체계적으로 특별한 신분이 주어지지만 죽음체험에서는 체험자들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의 실제 상황을 대입하는 것뿐이죠.” 체험자들은 정해진 가상현실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며 자신의 선택에 따라 게임 속 자신의 ‘생사’가 결정된다. 


“충분한 몸풀기 게임으로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 ‘죽음’을 맞도록 합니다.” 허이허의 설명이다.


죽음, 궁극적인 절대무력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한 달을 더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겠는가? 이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온하게 마지막 시간을 보내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러나 딩루이는 이 말이 거짓임을 가차없이 폭로한다. 


그는 “죽음은 사람의 일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죽으면 가족, 친구를 포함해 50명이 영향을 받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유산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등 여러 사회적인 관계를 정리해야 하니 사회적인 사건이기도 하죠”라며 불치병에 걸린 것도 개인의 일이 아닌 한 가정의 불치병이라 덧붙였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의 힘을 끊임없이 잃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관을 절개해 호흡기를 연결해 놓았거나 너무 아파 말을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가 에워싸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다. 생명의 덧없음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호스피스 사업 8년. 황웨이핑은 자신이 어느 날 말기 암 진단을 받는다면 분명히 당황스러우리라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맞는 거니까요. 준비가 안돼있을수록 고민이 많아지죠.”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이야기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죽음은 궁극적인 절대무력이다. 


황웨이핑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게 “죽음 앞에서 무력함을 인정해야 이를 전제로 침착하게 훗날을 준비한다거나 바라던 것을 이루는 등 더 큰 가능성을 찾을 수 있어요. 가족들과 잘 소통하고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이라도 죽음을 앞두면 바람이 이뤄질 가능성이 더 큽니다”라고 조언한다.


가상의 화장 소각로에 누워 아치형 LED 조명으로 활활 타는 불꽃이 연출되고 소각로의 온도가 서서히 높아지자 체험자 리레이(李雷)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소각로에 누워있는 장면이 생각나면서 피할 수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꼈다. 


리레이의 아버지는 2012년 말기 암 진단을 받았는데, 확진을 받고 6개월만에 돌아가셨다. 2년 후어머니가 혈액계통에 문제가 생겨 한 주 동안 입원해 있다 돌아가셨다. 스물 여섯에서 스물 여덟 살까지 2년 동안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여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리레이는 아버지와 평생의 아쉬움이나 이루지 못한 바람, 죽은 뒤의 일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고 말하기 전에 여러 번 생각하는 성격 탓에 아버지와 대화도 거의 없던 터라 갑자기 깊은 대화를 나눌 줄도, 나누는 방법도 몰랐다. 


생이별은 한국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감동적이지 않다. 사별은 차갑고 딱딱하다. 전통적으로 금기시되어 온 탓에 피하려 애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리레이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아버지를 돌보았다. 그러나 과묵한 두 남자의 대화는 치료상황과 병원생활이 전부였다. 예견된 사별 앞에서 두 사람은 말을 아꼈다. 


아버지와의 사별 후 세례를 받고 기독교신자가 되었지만 정신적인 위안을 얻기에는 부족했다. 우울한 기분에 자주 빠져들고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순간들, 다른 방법을 썼으면 아버지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자책과 후회가 끊임없이 머리 속을 스쳤다. 


죽음체험관 게임 중에는 암 환자의 임종을 여덟 단계로 나눠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치료효과가 떨어지고 환자의 고통이 심해지는 프로그램이 있다. 각 단계에서 환자가 치료 포기할 것을 부탁하면 체험자는 가족으로서 환자를 위해 치료를 이어갈지 포기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현실에서 리레이도 이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선 적이 있다. 2012년 아버지가 말기 암 확진을 받았을 때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마지막 날까지도 리레이는 ‘적극적인 치료’를 선택했다. 


리레이는 “혼자 결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친척들이나 어른들도 계시니까요. 앞으로 어떻게 치료할 지 온 가족이 함께 결정합니다. (치료를 포기하기로) 결정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이라 생각할 테니까요”라며 당시 어려웠던 선택의 순간을 떠올렸다. “(결국) 독성이 지극히 강하지만 일시적인 억제작용을 하는 주사를 견디지 못하면 쇼크가 오니까요.” 그러나 쇠약해진 아버지의 몸은 결국 주사를 버텨내지 못했다. 


그 후 리레이는 계속해서 그 때 생각이 났다. 치료를 계속 했다면 아버지께서 좀 더 사실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만약’은 없다. 


아버지는 집안의 대들보였다. 자폐와 열등감, 약간의 강박증이 있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집에서 돌보던 때였는데, 그런 아버지의 암 소식을 알게 되자 리레이는 가정이 갑자기 무너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리레이가 공장을 퇴직하자 어머니는 집에만 계셨다. 사회와 담을 쌓고 친구도 없이 은행에 가서 돈을 찾거나 장을 보는 기본적인 생존활동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정신과에 가 보았지만 약도 후유증이 있고 불편해 치료가 흐지부지되었다. 어머니 때문에 대학 때부터 심리학 책을 읽으며 심리학을 전공하고 심리치료사 자격증까지 딴 리레이였지만 이런 지식도 어머니의 생활이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와의 사별 후 리레이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혼자 생활하면 안 좋다는 걸 알면서 왜 처음에 좀 더 강경하게 상해로 모시고 오지 않았을까? 왜 좀 더 일찍 모시고 와 간병하지 않았을까? 


상하이에서 고향 닝보(宁波)로 돌아가 영양불량으로 깡마른 어머니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리레이는 깜짝 놀랐다. 


살아있는 마지막 2년 동안 어머니는 외로움 속에 빠르게 쇠약해졌다. 리레이는 “(어머니는) 모순되게도 죽는 것이 두렵고 잘 살고 싶어 하면서도 삶에 대한 태도는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마지막에는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매우 약했죠”라고 회고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더 임박해 왔다. 어머니는 상하이의 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해 있다가 병도 확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돌아가셨다. 


병실에서 리레이는 무너졌다. 마음이, 진짜 가슴이 아팠다. 그 때부터 그는 알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려 커피도 잘 못 마신다. 병원에서 검사해 보아도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이후 딩루이의 강의를 들으며 리레이는 죽음체험관에서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용기를 내어 지원했다. 부모님이 살아있는 체험자들이 부모의 임종을 앞둔 병상 앞에서가 아닌 체험관에서부터 ‘고별’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죽음을 향한 삶

 

▲ © 중국신문주간 한국어판
2008년 원촨(汶川)지진이 일어났을 때 황웨이핑는 심지치료사로서 재난지역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실제 죽음과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차가움과 이기심, 맹랑함, 저마다의 사정들을 한꺼번에 모두 알게 되었다.
황웨이핑은 화학공업원료업체의 사장이었다. 그는 36세 본명년(本命年)에 인생의 슬럼프를 만나 전에 없이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사는 게 재미가 없었어요. (당시) 돈 걱정도 없고 30년, 50년 지나도 똑 같을 것 같은 거에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것도 황웨이핑을 괴롭혔다. 황웨이핑은 부모님을 따라 화학제련공장에서 자랐다. 모든 사람들이 매우 단순한 논리 속에 획일화되고 전 직원의 소속감이 매우 강하며 허위, 속임수, 부정이 용납되지 않는 국유기업에서 자라 사회로 진출하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을 항상 치켜뜨고 있어야 하는’ 상업적 논리로 이뤄진 사회에서 그는 외로웠다. 


황웨이핑은 조직폭력배 생활도 해보았으나 영화에 나오는 강호의 의리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돈만 좇는 조직으로 전락해 버리더라고요.” 먹고 마시며 여자와 도박으로 방탕한 생활로 황웨이핑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다. 


“원촨지진 덕에 살았죠.” 그가 말했다. 


원촨에서 황웨이핑은 자신이 살려주기 바빴던 그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큰 일이 일어났을 때 뭔가 역할을 감당하고 남을 돕는 기분이 참 좋잖아요. 살아있음을 느끼고, 살고 싶어지고”라며 당시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분석했다. 


‘원찬지진’을 계기로 황웨이핑은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스스로를 원망하며 한탄하는 '중년 불안증'에서 벗어났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가 자신이 한번도 죽는다는 것을 진정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의식해야만 진정한 삶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흔히 말하는 ‘죽음을 향한 삶’이죠.” 


우울증을 앓고 있는 34세 마리는 '죽음체험' 프로그램에 두 번 참여했다.


첫 번째 체험 당시 그녀는 “한도 끝도 없는 두려움”으로 참여해 프로그램 시작부터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두운 길과 가상의 화장 소각로를 가장 무서워해 <심경(心经)>을 외우며 두려움에 저항했다. 


한 번의 체험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았지만 마리는 호전되고 있었다. 


체험을 마친 다음날 마리는 아침에 일어나 옷 두벌을 사러 갔다. 우울증에 걸린 뒤로 오랫동안 바지, 신발 할 것 없이 검정색 옷만을 입던 그녀가 상점에 가서 자신을 위한 흰색 치마와 무늬가 있는 치마를 골랐다.
올해 3월의 어느 날 저녁. 마리는 침대에 누웠다가 절망스러운 상황이 파도처럼 온몸에 퍼져 자신을 침몰시켜버리는 것을 갑자기 발견했다. “그 때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자살했을 텐데 혼자서는 전혀 움직여지지가 않았어요.” 파도가 빠져나간 후 마리는 놀란 가슴이 지정되기도 전에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나 죽고 싶어”라고 말했다. 


남편은 안아주지도, 관심을 갖고 물어보지도 않고 돌아누워 계속 잤다. 


“나 혼자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 절망적인 밤에 옆에 누워있던 남편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녀의 기분을 알아주지도 못했다. 마리는 ‘내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마리는 베이징대학 제6병원에 가서 많은 검사를 받았다. 그날 마리는 ‘바보’가 된 것처럼 행동이 매우 굼뜨고 의사의 질문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반드시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중증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입원을 하겠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마리는 거부했다. 


마리의 병세는 2년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2년 전 가정의 변고와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겪으면서 가벼운 우울증 반응을 보였지만 겉으로는 전보다 더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기를 쓰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 거죠. 남들이 알면 안되니까.” 마리가 말했다. 그녀는 웃는 얼굴이나 긍정에너지 표출로 모든 것을 덮어버렸지만 마음 속 답답함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2년 후 그날 밤 완전히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해 보았지만 마리는 바깥세상 사람들과 멀어졌고, 남들은 그녀의 절망을 알아주지 못했다.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에서처럼 ‘안전 섬’과 ‘우정 섬’이 파괴되고 나 혼자 버티고 있는 상태였죠.” 


우울증 진단을 받은 후 마리는 직장에 병가를 내고 집에서 쉬었다. 아이보다 허약해져 쉽게 피곤해지고 예민해지며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어졌다. 아이 앞에서는 언행을 통제하려 노력했지만 아이에게도 부자연스러움은 느껴졌다. 


하루는 일곱 살 된 아들이 말했다. “엄마. 밖에만 있으면 죽어라 소리지르고 싶어. 집에 오면 억제가 안될 것 같아.” 아들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 엄마 옆에 붙어 엄마의 말 따라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말 소리가 조금만 커도 마리의 반감을 일으켰다. “아들이 틀리게 말해서 화난 게 아니라 엄마가 소리에 예민해서 그래”라고 거듭 설명을 했다. 


우을증에 걸린 후 마리는 죽음에 대한 자신이 두려움이 ‘진짜로 살아본 적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했다. 


그녀의 모든 선택은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였다. 서른 네 살 때까지도 그녀는 규칙 속에 살았고, 체면, 안정,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자기다운’ 그녀 본연의 자아는 없었다. 그녀는 생각이 없어졌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럭저럭 잘 맞았다. 남편이 무엇을 원하는지 민감하게 알고 남편이 필요한 곳에 있으려 노력하다 보니 나는 남편의 부속품으로 전략해 버리고 결혼생활은 “관계는 좋지만 나 자신은 편하지는 않은” 생활이 되어버렸다. 


마리는 천성이 예민하고 남의 태도에 신경 쓰면서 자책을 잘했다. 이런 속박을 벗어나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도 있다. “요구사항 있으신 분은 저 죽은 다음에 하세요. 저 자신으로 죽으면 안될까요? 저 자신을 위해서 하루만 살면 안 될까요?” 


두 번의 ‘죽음’을 체험하면서 그녀가 가장 확실히 느낀 것은 “원래는 죽음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현재 마리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던 상태에서 밑으로 내려와 산책을 시작하거나 아침을 챙겨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다시 밥을 차려먹을 때 성취감으로 가득했는데, 밥을 다 먹고 젓가락을 쟁반에 내려놓기도 전에 침대로 기어올라가 쓰러져 잤어요. 마라톤 완주 두 번 한 것처럼 힘들었죠.”


말을 마치고 마리가 스스로 기운을 북돋우는 듯 몇 번 웃었다. 


마리는 “죽어서 갔다가 살아 돌아왔다”고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다. 몸의 신진대사처럼 ‘올곧은’ 자신의 모습은 조금 죽고 억눌려 있던 그대로의 자아가 서서히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저승사자는 누구에게나 있다


허이허는 멕시코의 주술사 돈 후안(Don Juan)의 표현을 좋아한다. “저승사자는 누구에게나 있다. 왼쪽어깨 뒤에.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모르겠으면 뒤돌아서 ‘형제의 생각은 어떻소?’라고 물어보라.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 의미 있는 삶을 살라.” 


‘깨어남’의 체험자 중 엘리는 ‘고장’ 때문에 저승사자가 문을 두드리는 것을 실제로 경험한 후부터 다시는 ‘자살’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올해 11월 엘리는 이혼한 지 3년이 되었다. 3년 전 농담 중의 극히 황당한 재산 분배방식을 도화선으로 엘리는 한 상하이 남자와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딸(엘리)의 재혼을 생각해 아버지는 엘리에게 이혼한 후 아이의 양육권을 요구하지 말라고 했지만 엘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아이의 양육권을 가져온 후 자신의 이혼이 초등학생 딸아이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엘리는 항저우(杭州)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홀로 두 아이를 대리고 상하이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로 아버지는 엘리를 냉대했다. 처음에는 매우 힘들었지만 엘리는 상황을 바꿀 수가 없었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렇게 서서히 멀어졌다. 


이공계 출신 여성인 엘리는 이혼 전 작은 부동산회사의 부사장으로 사업을 맡아 공사현장에 가는 일이 잦았다. 일을 할 때 그녀는 여장부가 되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다 보면 불평할 시간도 없이 앞으로 전력 질주하기 바빴다.


하루는 사업 총 책임자가 회사 사장과 충돌 끝에 공사현장으로 조폭을 보내 공사를 방해했다. 사장은 당황해 어떻게 대응할 지 전혀 몰랐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제 사명이었어요.” 그 일을 떠올리는 엘리의 말투가 여전히 살기등등했다. 그녀가 부른 퇴직한 무장경찰 수 십 명이 전기봉과 장비를 들고 공사현장을 향해 서자 조폭들은 싸움을 시작도 하기 전에 놀라 달아났다. 


엘리는 “‘내유외강’에 속한다”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격이 불 같고 분수를 모르는 독설가였다.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엘리는 말에 매우 예민해졌다. 다른 사람이 조금만 자신을 건드려도 즉시 반격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일을 하면서 그녀의 인간관계와 결혼, 자기 자신까지 심한 상처를 입었다. 


엘리는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주식을 했다. 정해진 SNS 커뮤니티 외에 다른 곳과는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생활은 게으르며 산만해지고, 가끔 산책 나가는 것 외에는 중년의 불어만 가는 몸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친구가 그때 제 모습이 누가 달래도 달래지지 않는 떼쟁이 아이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결혼 실패하고 주식은 떨어지고, 두 아이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이혼의 상처를 최대한 낮춰야 했지만 냉전 중인 부모님께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엘리는 자신이 스스로 올가미에 든 것처럼 답답하고 우울했다. 


죽음체험관에 가기 며칠 전 엘리는 죽음을 생각했다. 두 아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을 억눌렀다. 아이들이 그녀의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엘리는 ‘죽음의 문’을 넘어 화장 소각로로 향하는 어두운 길로 들어서 더듬거리며 앞으로 향하는데 끝까지 가도 다음 길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어둠 속에 있는데 길에 가상으로 틀어놓은 저승사자의 ‘포효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아무렇게나 만져볼 수 없었다 “어디엔가 팬 날개가 있어 손가락이 잘릴까봐 무서웠어요.” 엘리가 자신의 삶을 바꿔놓은 체험의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보통은 엘리가 끝까지 걸어가면 진행자 허이허가 방송을 통해 왼쪽으로 돌아 ‘화장 소각로’ 통로로 들어가라 안내해 주는데, 방송이 갑자기 고장나는 바람에 엘리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어두운 세상에는 울음소리와 팬 돌아가는 소리가 섞여 만들어내는 기괴한 화음뿐이었다. 허이허가 소리를 키웠는데도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현실로 바뀌고, 로비에 있던 체험자 모두 엘리가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주 한참 후에’ 엘리가 마침내 왼편에 있는 길을 찾았다. “스스로 구제하기”에 성공한 것이다. 가상의 화장 소각로에 누워 엘리는 자신이 얼마나 ‘죽기 싫어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체험관을 떠나온 다음날 엘리는 자신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는 일을 하나 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냉전 3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에게 “상하이에서 혼자 아이 둘 키우며 살려니 너무 힘드네요. 어떨 때는 그냥 죽어버리고 말자는 생각도 해요”라는 말과 함께 보고 싶다고 말했다. 


수 년 간 대립 끝에 딸의 ‘항복’을 보며 엘리 아버지도 응어리가 풀렸다. 그날 저녁 두 모녀는 서로 용서했다. 아버지의 응원을 받으니 엘리는 갑자기 혼자 상하이에 있어도 ‘그렇게 외롭지 않다’고 느껴졌다. 


‘죽음’을 한 번 체험한 후 엘리는 자살의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차분하게 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서워 죽겠더라고요” 엘리가 말했다. 


‘부활’ 후 한달 남짓 동안 엘리는 몸매관리를 시작하고 일자리도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문제를 만나면 엘리는 본능적으로 흥분을 한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발견한다. 그가 이제까지 살아있도록 지탱해준 힘이기도 하다. 


죽음 앞에 정답은 없다


‘죽음체험’은 ‘깨어남’ 만의 고유상품이 아니다. 


2009년 한국인 정준(郑俊)도 한국의 고공행진 하는 자살률에 대응하기 위해 ‘죽음체험요법’ 사업을 시작했다. 체험자들은 흰 두루마기를 입기, 유서쓰기, 영정 들기, 입관 등을 통해 10분 동안 죽음의 ‘허무함’을 누리며 삶에 대해 생각한 후 해탈하고 부활한다. 이러한 체험방식은 한국에서 젊은이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2014년 가장 인기를 끈 한국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중국 국내에서도 선양의 심리상담기관 창립자 탕위룽(汤玉龙)이 2009년부터 상담자들의 심리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죽음체험’ 방식을 시도했다. 


탕위룽이 기획한 체험프로그램에 따르면 그는 3일 동안 상담자의 증상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각본을 짜 경험 있는 상담사에게 체험자의 남편, 자식, 부모, 직장동료 등의 역할을 맡긴다. 체험 당일에는 5~6m2 의 체험실을 빈소 모양으로 꾸미고 장송곡을 틀며. 체험자는 가운데 놓인 관에 누워있고 역할극을 맡은 상담사가 각본에 따라 울며 하소연하거나 고별소감을 발표한다. 체험자는 40~50분 동안 관에 누워 조용히 자신이 죽은 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느낀다. 체험이 끝나면 상담사는 체험자의 피드백에 따라 해답을 준다. 


2014년 탕위룽은 직원들의 요청으로 ‘죽음체험’ 모델을 상하이에 소개했으나, 사원들이 적은 투자자금으로 빨리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으로 만들고 상업모델을 복제할 수 있기를 원했고 ‘엽기체험’ 정도의 마음으로 참여하는 고객이 대부분이라 성공하지 못했다. 탕위룽은 선양으로 돌아와 1대1 심리상담과 ‘죽음체험’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했다. 


도시의 카페에서도 ‘죽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2011년 영국의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가 런던에서 첫 번째 ‘데스 카페(Death Café, 죽음 카페)’ 모임을 개최했다. 한 무리(대부분 모르는 사람)의 사람들이 모여 ‘죽음’이란 주제를 놓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 존은 인터넷에 카페의 취지를 소개하고 카페를 전 사회적인 가맹활동으로 발전시켜 사람들이 어느 도시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든 ‘데스 카페’를 열 수 있도록 했다. 현재까지 미국, 영국, 호주 등 20여개 국에서 수 백 명이 3,500회가 넘는 ‘데스 카페’ 모임을 가졌다. 


이 중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 일곱 차례 열린 ‘죽음 차회’ 행사도 있다. 차회는 한 달에 한 번 베이징에서 얼린다. 최근에 열린 8월 차회에는 20~30세의 젊은이 여덟 명이 자신의 사연과 호기심을 갖고 참여해 ‘죽음’을 대비했다. 


황웨이핑은 ‘깨어남’의 죽음체험이 사회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보급되었으면 하는 욕심은 없지만 “사람들이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는 시대가 오면 자신의 ‘죽음체험’사업이 적어도 한 부분은 차지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개관한 지 넉 달. 사람들의 반응은 상반되게 나타난다. 죽음체험으로 인생이 바뀌었다며 크게 감동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관(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바르지 않고’ ‘부정적’이라며 소비자협회에 고발하는 사람도 있다. 


허이허는 이를 매우 자연스런 현상으로 본다. “진짜 인생처럼 진상을 마주하며 무너지는 사람도 있고 이를 통해 상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신고전화를 받는 세 시간 동안 황웨이핑은 참을성 있게 해명하며 위로했다. 효과는 없지만 그는 “씨앗은 심겨졌네요. 이 일에 강한 강정이 생긴 거니까요”라며 자신했다. 황웨이핑이 가장 두려운 것은 무감각하게 자기 자신은 없이 무뎌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것이다. 


‘깨어남’의 초대 사회자 딩루이는 1,300여 구의 ‘시체’를 화장했다. 이들은 대부분 그의 인생에 스쳐 지나는 손님이 되었다. 


그러나 한 부부는 딩루이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 아주 사랑스런 부부였다. 남편은 온화하고 관대한 의사였고, 아내는 매우 격조 있어 보였다. 체험프로그램 중 친구를 안락사 시킬 것인지에 대한 토론에서 딩루이가 극본에 쓰여 있는 대사대로 “죽음은 외로운 거에요”라고 하자 남자가 갑자기 “저는 아내랑 같이 죽을 거에요. 진짜로 같이 죽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죽음의 길’이 열리자 딩루이는 관례를 깨고 부부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도록 허락했다. 모니터로 보니 아내의 시신이 먼저 컨베이어벨트로 올려져 화장 소각로로 들어가고 이어폰으로 남편이 울며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많은 체험자들이 이들 부부처럼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왔다 걱정까지 안고 돌아간다. 그들은 이러한 체험 한번으로 큰 깨달음을 얻거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한다. 


허이허는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학생”이라며 “’깨어남’은 죽음을 탐구하는 입구를 제공할 뿐”이라 말한다. 질문은 던지지만 답을 주지는 않는다. 답은 체험자 자신의 삶 속에 있다. 


(인터뷰 대상의 요구에 따라 기사 중의 리레이, 마리, 엘리는 가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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