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샤오쑤, 개혁의 정도 I

멍샤오쑤(孟晓苏)는 8년간 전(前)국가지도자 완리(万里)의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격동의 시대 중대한 개혁개방정책 제정 및 시행과정을 몸소 겪었으며 단호히 개혁을 추진했던 옛 지도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 중국부동산그룹(中房集团)에 오랫동안 재직하면서도 그의 ‘개혁본색’은 퇴색하지 않았고 ‘중국부동산의 아버지’라 불린다.
온라인팀 news@inewschina.co.kr | 2015-10-05 09:2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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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왕췐바오 글/뤼톈린


멍샤오쑤(孟晓苏)의 책상에는 <완리문선(万里文选)>이라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있다. 그가 이책을 항상 펼쳐보는 것은 지난 역사를 찾아보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전임지도자 완리(万里)의 사상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그는 <중문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완리선생님의 이전 연설은 지금 배워도 상당히 유익해요. 비서시절에는 너무 바빠서 선생님의 연설을 배울 시간이 많이 없었는데 지금 사회의 현실과 실제 업무와 결합해보니 선생님의 연설이 상당히 유용하더라고요.”라고 밝혔다. 


7월 1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완리 전(前)위원장이 별세했다. 멍샤오쑤는 자신의 웨이보(微博)에 “베이징병원에서 완리 선생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오전에 시진핑(习近平) 주석과 다른 상임위원들께서도 모두 다녀가셨다. 완리 선생님께서는 오후 12시 55분에 돌아가셨다. 탁월한 공을 세운 지도자, 평안히 가시길.” 이란 글을 남겼다. 


1980년대 멍샤오쑤는 중난하이(中南海)에 있었다. 그는 8년간 전(前)국가지도자 완리의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격동의 시대 중대한 개혁개방정책 제정 및 시행과정을 몸소 겪었다. 그 후 1992년부터 중국부동산그룹(中房集团)에 제직하며 여러 해 개혁개방을 깊이 연구해 사장과 회장 직에 올라 현재까지도 중국부동산그룹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중국부동산그룹에 재직할 당시 그는 주택제도개혁을 끊임없이 추진하였으며, ‘프로의식’으로 중국부동산그룹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중국부동산의 아버지’라 불린다. 

 

 

베이징대학에 다닐 때 위안밍위안()에서

1980년 대학교 학생회간부 리커창(李克强, 좌측 두 번째)멍샤오쑤(晓苏, 우측 첫 번째)













자동차공장 직원, 베이징대학에 들어가다


멍샤오쑤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입시험이 재게된 후 대학에 들어간 첫 세대다. 

 


그는 문화대혁명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베이징의 자동차제조공장에 들어가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공장 일을 한 지 10년째 되던 해에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입시험이 재개되었다. 당시 멍샤오쑤는 학교로 돌아가 공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공장 교육과장님이 대입시험에 등록해주었다.” 


1977년 멍샤오쑤는 베이징대학 중문학부 신방과에 입학한다. 그는 “등록을 해야 하나 망설였다. 당시 28세의 나이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자신이 없고 떨어지면 창피할까 걱정이 되었다. 더구나 그때 나는 공장에서 임원까지 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사실 멍샤오쑤는 일찍이 재능을 보였다. 그는 자동차제조공장 재직시절부터 <베이징일보(北京日报)> 리포터로 활동하며 <인민일보(人民日报)>, <해방일보(解放军报)> 1면에 많은 기사를 발표했다. 그의 기사는 대부분 노동자들의 생산과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공장에서 나름 유명했다. 


바로 이 때문에 “멍샤오쑤가 대학공부를 하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느낀 공장의 교육과장이 그를 대신해 적극적으로 신방과 시험을 등록해주었다. 멍샤오쑤가 ‘혼란 중의 시험’이라 표현할 만큼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붙으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결국 진짜 붙어버린 거에요!” 


당시 작문시험 문제는 ‘개혁전투에서의 1년(我在这战斗的一年里)’ 이었다. 멍샤오쑤는 공장에서 10년동안의 경험을 1년으로 압축해 공장에서 일하는 1년동안 어떻게 기술개혁을 진행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 과정을 적었다.


주요 간행물에 글을 발표했던 경험 역시 큰 가산점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온 몸이 노동자의 기질인 멍샤오쑤가 베이징대학 문턱을 넘게 되었다. 그날 베이징자동차 제조공장 운전기사가 짚(jeep)차로 멍샤오쑤를 등록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짚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동료들의 우애이기도 했지만 자동차 자체가 매우 적었던 시절이라 베이징에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그 후 다들 ‘자동차를 만들던 노동자 멍샤오쑤가 자동차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고 했어요.”


당시 베이징대학 신방과에는 두 개 반이 있었는데 멍샤오쑤의 동창 중에는 현재 언론계의 유명인사도 많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후 그는 웃으며 자신은 ‘본업보다 부업을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혁신은 우리의 운명

1978년 개혁개방의 서막이 열리고 중국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론을 연구하는 분위기가 캠퍼스까지 확장되었다. 멍샤오쑤와 동기들 역시 국가대사를 토론하는데 열중해 언제나 정치적 의제와 이론사조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번은 방송을 듣는데 프로그램에서 중국 일부 지역 농민들이 구걸하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일부 지역 농민들은 원래부터 밥을 얻어먹는 전통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멍샤오쑤와 동기들은 아주 웃긴 해석이라 생각했다. 그 후 당시 안후이(安徽)성 위원회 완리 서기가 임원 총회에서 “누가 농민들이 얻어먹는 전통이 있다 하는가? 누가 배부르면서도 밥을 달라 하는가? 농촌경제가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발언했고, 멍샤오쑤는 이에 주목해 전국적으로 농촌연대생산책임제 개혁에 앞장섰다.


“같은 문제에 대해 대학생과 개혁을 추진하는 국가 지도자가 느끼는 바가 같았다.”며 감회에 젖었다. 자신이 언젠가 그 지도자를 따르며 그의 비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베이징에서의 대학시절은 멍샤오쑤에게 많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1981년 3월 20일 남자배구월드컵에서 중국과 한국의 대결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다. 중국 팀이 근소한 차이로 한국팀을 이기자 베이징대학 캠퍼스가 들끓었다. 젊은 학생들이 화분그릇을 두드리며 승리를 자축했고 유리를 깨뜨리거나 빗자루에 불을 붙여 성화를 삼아 5·4광장에서 가두행진을 하기도 했다. 당시 멍샤오쑤와 법률과 학생 리커창(李克强) 역시 그 행렬에 있었다. <중국신문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멍샤오쑤는 “그날 대학생들이 많은 구호를 외쳤어요. 칭화(清华)대 학생들은 ‘나부터, 지금부터(从我做起,从现在做起)’, 베이징대 학생들은 ‘단결하여 중화를 일으키자(团结起来,振兴中华)이었죠.”라며 이 구호들이 사회적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고 회상했다.


당시 멍샤오쑤는 베이징대학 학생회 문화부 부장. 리커창은 학생회 상무대표회의 주석을 맡고 있었다. 상무대표회의는 학생회가 자주적으로 설립한 감독기관으로 학생임원으로서 나쁜 세태에 물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종신제를 시행하지 않고 자체적인 감독을 마련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또한, 학생회임원 신분으로 졸업하는 것을 종신제 시행과 같은 것으로 여겨 대학교 3학년되던 해에 단체로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멍샤오쑤는 “그때 대학생들은 생각이 확고해 기존의 규정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우리세대들은 혁신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겼어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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